“이해에는 여러 가지 층위가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동물이라 하더라도 자기 나름의 차원에서는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결국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디지스트 기초학부 이기준 교수·물리학)
“하지만 저는 김 선생이 제기한 의문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결국 언어의 한계 안에서 사유하고 있고, 실제로 그 한계를 들이받는 철학적 시도들이 계속 있어왔어요”(디지스트 기초학부 김남두 석좌교수·철학)
이 대화는 최근 ‘디지스트 목요 독서모임’에서 교수들이 일본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제노사이드’를 읽고 토론하는 중에 나온 이야기들이다.
목요 독서모임은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함께하는 ‘융복합 책읽기’를 위해 각 분야 기초학부 교수들과 출판부 편집자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특별한 책읽기 모임이다. 이공계 특성화 대학인 디지스트에서 과학의 관점만이 아닌 철학, 역사학 등 다양한 의견을 바탕으로 토론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목요 독서모임은 학부과정 개교를 코앞에 둔 지난 2월 시작됐다. 새로 지어진 학부 캠퍼스로 기자재와 연구실을 이전하고, 신입생 맞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였다.
모임을 제안하고 주도한 디지스트 프레스(DGIST PRESS·출판부) 김현호 편집자는 “가장 바쁜 시기에 책읽기를 시작해야 더 오래 갈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또 직접 교재를 집필하는 기초학부 교수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이 독서모임을 통해 ‘융복합’돼 더 훌륭한 교재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최경호 기초학부장을 비롯해 남창훈 김성균(화학), 이창훈(생물학), 이기준 박기성(물리학), 김남두(철학), 김대륜(역사학), 이두석 안흥주(수학), 최성희(음악), 이정아(영어) 교수 등 각 분야의 기초학부 교수들과 출판부 편집자들이 모여 2주에 한 번씩 함께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눈다.
나이든 석좌교수에서부터 젊은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격의 없이 책에 대해 난상토론하는 모습이 디지스트 기초학부에서는 낯설지 않다. 다양한 책에 대해 발제를 하고 토론에 몰입하는 시간을 갖는 독서모임은 바쁜 일상을 잊고 일상생활에 활력을 주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있다.
융복합과 창의교육을 표방하는 디지스트 기초학부 학생들은 국내 최초로 시행되는 무학과 단일학부 체제에서 학과 구별 없이 수학과 물리, 화학, 생물 등 기초과학에서부터 컴퓨터, 자동제어, 통계, 공업디자인 등 응용과학을 한꺼번에 배운다. 또 철학과 역사, 영어, 음악, 리더십 등의 인문소양과 예술교육도 이수해야 한다.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강력하고 집중적인 융복합 교육이다.
기초학부 교수들은 어떻게 해야 이런 다양한 지식들이 파편화되지 않고 융합될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목요 독서모임이 이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여러 분야 교수들은 서로의 지식을 교류하며 다양한 학문적 관점을 이해하고, 서로를 가르치는 동시에 배우고 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정년을 마치고 디지스트에 부임한 김남두 석좌교수는 “이공계 지식을 바탕으로 융복합 교육을 하고 있는 디지스트의 교육철학이 반영된 모임”이라며 독서모임을 극찬했다.
독서모임은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세 번의 모임에 걸쳐서 꼼꼼하게 읽었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깊게 읽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포의 노화 연구를 다룬 ‘헨리에타 렉스의 불멸의 삶’을 읽을 때는 생명윤리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학서만 읽는 것은 아니다. 장르 소설인 ‘제노사이드’와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 역사서인 ‘마르탱 게르의 귀향’ 등 다양한 책들로 그 범위를 넓혀가며 각자가 가진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는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의 저자들을 초빙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미 책을 읽고 치열한 토론을 거친 독서모임 회원들이 패널로 나설 것이기 때문에 심포지엄의 온도와 밀도는 다른 어떤 행사보다 뜨겁고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스트 기초학부의 독서모임 교수들은 융복합적 책읽기의 즐거움이 학생들에게도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구=최일영 기자 mc10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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