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기자로서는 처음으로 국방부를 맡게 되자 한 선배 기자가 “국방부 출입기자라면 꼭 봐야 하는 영화”라며 추천해준 것이 ‘장군의 딸’이었다. 1999년 개봉된 이 영화는 파격적인 소재와 치밀한 구성으로 꽤 괜찮은 흥행성적을 거뒀다. 영화는 조지프 캠벨 장군의 외동딸이자 대위인 엘리자베스 캠벨이 살해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군 수사관 폴 브레너는 캠벨 대위가 수많은 남성 장교들과 성관계를 맺는 등 문란한 생활을 한 것을 알게 된다. 브레너는 캠벨 대위의 일탈행위가 육군사관학교 시절 동기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일이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남성의 세계인 사관학교에 진학한 캠벨 생도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남자 동기생들보다 앞서 나간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동기생들이 야외훈련 중 그녀를 집단 성폭행한다. 성폭행보다 그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아버지와 학교 측 태도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명예로운 군인이자 부통령 후보로 주목받고 있는 미 육군의 거물인 아버지 캠벨 장군은 이 사건을 덮는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다. 학교 역시 불미스러운 일이 외부에 알려질까 봐 그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장교가 되려 했던 그는 아버지의 냉대와 진실을 외면하는 학교의 행태에 좌절한다. 캠벨 대위는 군인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문란한 생활로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군내 골칫거리가 되는 방식으로 보복한다. 결국 그는 성관계를 가졌던 사람에게 살해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영화는 군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의 폐해와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잘못을 습관적으로 은폐하는 군의 행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선배 기자가 이 영화를 권한 데는 국방부 첫 여기자로 군내 소수자인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간과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것 같다. 또 불리한 일은 일단 숨기자는 속성은 미군이나 한국군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므로 매와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파헤치라는 당부도 있었던 것 같다.
선배의 당부를 제대로 이행해왔던 건가. 최근 군에서 발생하는 성 군기위반 사건들을 보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감출 수 없다. 여군에 대한 성범죄 사건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고 있다. 군에서 벌어지는 성범죄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군은 엄격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곳이다. 계급이 곧 권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상급자의 영향이 막강하다. 하급자들이 상급자의 행위에 대해 반발하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피해자에 대한 보호도 정밀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피해자가 원인 제공을 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거나 다른 부대에 배치돼도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성범죄 사건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성희롱 등을 당한 여군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0년 3월 20일 강원도 화천 전방부대 야산에서 목숨을 끊은 육군 심모 중위와 2013년 10월 15일 화천 또 다른 부대에서 자신의 차안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한 오모 대위 역시 오랜 기간 상급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군은 두 사건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다가 유족이 문제제기를 하자 뒤늦게 허둥지둥 재조사에 나섰다. 군이 수차례 성범죄에 대해 무겁게 다스린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현역 사단장이 성 군기 위반으로 긴급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 뒤 육군은 10일 성범죄에 대해 ‘무관용’을 적용하겠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 말을 믿을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신뢰 회복을 위해 군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
[내일을 열며-최현수] 영화 ‘장군의 딸’의 교훈
입력 2014-10-11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