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한글을 하나님께

입력 2014-10-11 02:52

한글날이 다시 휴일이 되어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글이 있다는 자긍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세계선교에 대한 여러 이론과 주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언어를 주님께 드리자’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선교는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나라가 있고, 복음이 전파된 나라 중엔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부족이 있다. 선교는 이들에게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생활과 문화가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말과 글도 당연히 선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말만 있고 글이 없는 부족에게 글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글을 만든 것이지 이미 말은 있었다.

언어는 그 나라와 부족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단어와 발음, 어순 등이 언어의 특징을 지니는데 그것은 그 나라와 부족 사람의 중요한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럼 그 말과 글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글로 성경을 읽고 그 말로 기도하는 것이다. 돈은 중립적이나 그 돈이 헌금으로 드려지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것이라면 개성을 말살하고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서 공통된 하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자면 다양성은 하나님을 반하는 것이다. 바벨탑에서 언어를 흩으신 것(창세기 11:1∼9)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 즉 다양한 언어는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을 가만히 잘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이 언어를 흩으신 것은 바벨탑을 멈추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땅에 흩어져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본분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힘을 규합하였다. 철저히 하나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 됨을 깨뜨리기 위해 그들의 의사소통에 균열을 만드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상황에서는 하나 됨이 하나님을 반하는 것이고 다양성이 하나님의 처방이다. 냉정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선한 것에 일치가 쉬운가, 악한 것에 일치가 쉬운가. 후자가 훨씬 더 쉽다고 인정한다면 일치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 즉 우리의 개성을 충분히 살리되 그 개성을 하나님의 것으로 올려드리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더 적절한 방법이다.

말과 글이 다름을 해소한 한글의 등장은 대단한 변혁이다. 비슷한 변혁은 성경 번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양반만 한자를 쓰고 평민은 문자가 없던 시절에 한글의 등장이 새로운 시대를 연 것과 비슷하게, 라틴어로만 쓰여 성직자만 가지고 읽던 성서가 백성의 언어로 번역되어 누구나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성서가 된 것은 실로 엄청난 개혁이다. 그것이 성서 언어를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서의 품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기우는 이제 없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말로 기도하거나 성서의 글을 우리의 입으로 읽지 않는다면 그 말과 글은 그저 중립적일 뿐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없다.

읽혀지지 않는 성경책은 다른 책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생각만 하지 말고 꼭 말해보자.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상대의 부드러워지는 표정은 되돌아오는 큰 선물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9:21)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