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사람들' 즉 열심당이 계획한 초막절 폭동에 끌려들지 않도록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흩어 보내신 후 절기의 중간에 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절기의 마지막 날 예수께서는 서서 크게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이미 폭동이 진압되었으므로 예수께서 그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고,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하속들이 그를 잡으러 갔다가 그냥 돌아오자 상전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상전들이 노하여 하속들을 꾸짖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예수께서는 성 밖의 감람산으로 가셨다(요 8:1). 각 지역으로 보냈던 70인의 제자들과 거기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돌아온 제자들이 그분께 보고했다.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예수께서 고개를 끄떡이며 이르셨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사탄의 계략은 ‘하나님의 아들’을 열심당의 폭동에 끌어들여 체포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지혜롭게 대처하여 그와 제자들은 올무에 걸리지 않았고, 실패한 사탄은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진 것이다.
“옳소이다. 그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그와 제자들이 유숙할 곳을 찾기 위해 감람산을 넘어 베다니 마을 쪽으로 갈 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외로운 신세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외로우시니 그 아들도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그분을 따라오는 사람들 속에서 한 율법교사가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여러 계파 중에 그래도 바리새인 쪽에 관심이 있으셔서 그들과 식사도 자주하고 대화도 나누셨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는 것은 ‘말씀’이 아닌 ‘율법’이었고, 그들의 관심은 ‘사랑’이 아닌 ‘권위’에 있었다. 율법교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이웃을 사랑하라(레 19:18)는 말씀을 알고 있으므로 그렇게 행하라고 하시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그러자 예수께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하고 싸매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선’을 따르지 말고 이웃을 치료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착함’을 따르라고 권하셨다. 그 후에 그분의 일행도 베다니 마을을 지나가다가 한 ‘착한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 10:38)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 앉으신 예수께서는 그분을 대접하기 위해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보다는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동생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그분의 ‘외로움’은 거처할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파는 그를 경계했고, 율법을 중요시하는 바리새파는 그를 비난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혹시 은둔하는 수도 공동체 ‘엣세네’파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엣세네 공동체는 노동이 끝나면 찬물에 목욕을 하고 흰옷으로 갈아입은 후 감사를 드리고 함께 식사를 했다. 외부인들에게 이들의 정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8-5)
그러나 예수께서 세상과 격리된 은둔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눅 11:33)
그분에게 등불이란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자신을 태우는 것이고, 소금이란 세상에 들어가 자신을 녹이는 것이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필요 없어 내버리느니라.”(눅 14:34∼35)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유숙한 예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는 세상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빛이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마침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한글개역판)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한글개역판)
그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셨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수원 ‘기혼’ 샘은 성 밖에 있었다. BC 701년 앗수르군의 포위를 당하기 전에 히스기야 왕은 바위 속으로 굴을 뚫어서 지하 수로를 건설하고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여 ‘실로암’ 못에 저장하도록 했다(대하 32:30). 실로암의 물은 예루살렘 백성의 생명수였던 것이다. 소경은 가서 그 물에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요 9:14)
바리새인들이 다시 그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자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 한글개역판)
그러자 무리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떠들었다.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소경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6)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입력 2014-08-29 0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