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양단간에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처럼 정답이 정확히 나오는 객관식이 아닙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어느 것은 어떤 면에서 더 옳고, 또 다른 것은 어떤 면에서 더 옳은 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기로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나은 것을 선택하며 ‘비교우위’라든가 ‘우선순위’라든가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지만 비교했을 때 좀 더 나은 것, 혹은 시간적으로 볼 때 좀 더 급한 것을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만도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라든지, 비교우위를 따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닥칠 상황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은 희망을 앗아가 버립니다. 절망이며 낙망입니다. 밤을 새우며 이리저리 조각을 맞춰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고집을 부리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을 믿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우리들에게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8장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과 그에게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도 무시합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과부의 끈질긴 요구가 귀찮아 탄원을 들어줍니다.
주님은 7절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는 말로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8절에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로 말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많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소리쳐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진솔하게 하나님 음성을 듣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최근 저는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떤 결정을 두고 고민할 때마다 믿음의 해답을 주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제 얘기를 다 듣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자네의 전부를 원하신다네. 사람들의 완전한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계시지. 아무리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믿음으로 돌진해 나가게.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이끄시고 책임져 주신다네.”
저는 그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믿음을 떠나 머리로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려 했던 내면 깊은 곳의 인위적인 속내를 반성했습니다. 우리는 머리로 풀어나갈 수 있을 만큼의 일만 생각하고 그 일에 집착합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몸부림치는 우리를 향해 주님은 “말세에 내게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으로 질책하십니다. 지금 기도하는 믿음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때입니다.
심강기 목사(광주 에덴교회)
[오늘의 설교] 기도하는 믿음이 있는가
입력 2014-08-19 0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