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로(實學路)’.
조선 후기.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실사구시의 학문태도를 강조한 실학.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 외에도 유형원 이익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김정희 최한기 등이 이 사상을 이끌었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하고 경직된 조선이 살 수 있는 탈출구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정약용 등 실학사상을 지닌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대참수를 감행했다. 오늘 우리는 ‘다산 정약용’으로 아이콘화된 실학을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
도로명 실학로. 정약용이 태어난 경기도 양평이나 그의 유배지 전남 강진에 있는 길이 아닐까? 그런데 그 실학로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있다. 대둔산 자락 아래 산골 동네다.
이 ‘역사 이름 길’은 6.5㎞다. 서대전역에서 635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 보면 15㎞ 지점에서 대둔산 쪽으로 이어진다. 올해 전면 시행된 새로운 주소 체계에 따라 붙여진 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실학로 중간 지점 지방리. 지방장로교회와 천주교 진산성지성당이 800m 거리를 두고 있다. 이 신·구교 회당 두 곳이 실학로로 명명된 이유다.
선교적 도로명 ‘실학로’
지난 22일. 진산면 지방리 지방장로교회 주일예배 후 교회 앞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만난 이 교회 출신 지역교회사 연구가 류흥수(81·금산제일교회) 은퇴장로의 얘기.
“지방장로교회가 세워진 것이 1903년 일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1세기 전인 1791년 바로 이 마을에서 조선을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인 ‘진산사건’이 발생합니다. 실학자 윤지충(1759∼1791)과 권상연(1759∼1791)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참수당하는 사건 말입니다. 이곳 출신인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면서 한국 기독교 최초 순교자입니다. 그가 어머니 권씨 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왔고 교리에 따라 위패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종사촌 권상연도 함께했고요. 이 벽촌에서 일어난 제사 문제가 조선 정국을 뒤흔들 줄 누가 알았겠고, 하나님 믿는다는 이유로 3대가 멸문지화를 당할 줄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진산성지성당 출입구 오른쪽엔 두 순교자의 기념비가 나란하다.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 조정에 알려졌고 정파 싸움의 빌미가 됐죠. 정약용 등 소위 남인 제거를 위한 ‘신유박해’의 시작이었죠. 진산은 지금도 산에 둘러싸인 오지인데 당시엔 어떠했겠습니까? 중앙정부의 관심 지역이 아니었죠. 진산관아에선 바로 윤지충을 체포했어요. 권상연은 관아에 자진 출석해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신앙이 아니라며 항변했으나 먹힐 리 없죠.”
류 장로는 한참을 설명하다 교회 앞길로 이끌었다. 그는 이 길이 ‘실학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소명해 그 명칭을 관철시킨 인물이다.
“이쪽이 전주(全州) 방향입니다. 진산은 당시 전라도 땅이었으니까요. 두 순교자와 권씨, 윤씨 3대가 손발이 묶인 채 전주 감영으로 향했겠지요. 그때 전주 가는 길이 오죽 험난했겠습니까? 죄인을 말 태워 보냈을 리 없고 순전히 산길을 걸어서였겠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세 살배기까지 죽였어요.”
팔순의 장로는 이렇게 설명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전후좌우를 둘러봐도 산만 보이는 동네. 한양이 걸어서 보름 걸리던 시절이었다.
윤지충·권상연에겐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며 배교를 거부했다. 두 사람은 그해 12월 8일 끝내 전주 감영에서 참수된다.
패역한 땅 진산, 신·구교와 이방 종교 혼재
이렇게 패역한 성읍 진산은 당연히 폐현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배자, 몰락한 양반, 전쟁 및 범죄 도망자 등이 몰렸다. 이곳에서 만난 노인들은 “산세가 험하니 당연히 기가 센 땅이 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때문에 진산 사람들은 기복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연유로 지금도 이 지역엔 크고 작은 사찰은 물론 무속, JMS, 구원파 등 종교적 특수성이 어느 지역보다 짙다. 특히 JMS 교주가 태어난 석막리란 곳은 그들에 의해 성역화(?)됐다.
18세기 말 두 순교자의 피는 100여년이 지난 뒤 한국사회에서 흔치 않은 자생적 개신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지금의 지방장로교회다. 설립 연도가 문서상으로는 1906년, 구술상으로는 1903년인 금산지방 첫 교회가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다.
류 장로는 “집안 구전으로는 할아버지 류기택(한학자·1860∼1919) 어르신께서 1903년 서울에서 YMCA 창립 멤버로 가입하시고 1903년 12월 12일 사랑방에서 ‘기독청년’이라는 간판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부모님께 수없이 들었다”며 “하지만 ‘지방리교회사’는 190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시작된 지방리교회(당시 명칭)는 초대 영수 류기택에 의해 진산 및 금산 복음화에 불을 댕긴다. 류기택은 미국남부장로교 선교사들의 지원으로 1909∼1919년까지 매서인 및 권서인으로 활동하며 구령 및 문명퇴치 교육에 힘쓴다. 그는 1909년 대한제국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 4년제 민족학교 심상소학교를 세운다.
이 교회 양광연 목사는 “1907년 무렵 두메산골 교회였지만 교인이 100명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했다”며 “초대 당회장으로는 남장로교 마로덕(한국명·1875∼1960) 선교사이나 워낙 산골이라 연 2회 정도 순회하며 문답과 성례전을 집례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중심으로 배출된 기독교 인재들은 1914년 진산군이 금산군에 흡수되면서 금산 지방의 초기 기독교인이 되어 지금의 진산교회 등 곳곳에 교회 설립을 이어간다. 한편 금산군은 1963년 1월 1일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된다.
향촌사회, “성경 가르침대로 못하겠다”
사실 진산 성읍은 전통적 향촌 사회가 기독교 전래와 함께 어떻게 변해 가는지 엿볼 수 있는 지역공동체의 미시사이다. 조선 후기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남인 계열 양반이 진산이라는 험한 산세의 향촌에 자리를 틀었다. 진보적인 그들은 서학(기독교)을 받아들이며 반상 갈등을 극복해 나갔다. 양반가 류기택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형제요, 평등하다”며 복음을 전한다.
류흥수 장로의 말.
“할아버지는 지방리 토호였고 텃도지(가난한 사람이 땅을 빌려 지은 집의 집세를 일걷는 말) 등을 받았죠.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 살기 힘들었죠. 개명한 할아버지가 ‘교회 출석하면 텃도지와 장리를 깎아주겠다. 내 소유 산에서 나무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는데 누가 안 나오겠어요. 지게에 ‘지방리교회’라는 화인도 찍게 했어요. 초기 선교 형태였죠. 한데 문제가 발생해요. 증조부의 경우 ‘상것에게 텃도지 낮게 해줬더니 그것마저 못 내겠다며 버티며 양반에게 덤비냐’며 ‘성경 가르침대로 못 하겠다’고 형님에게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적인 것들과 맞물려 지역공동체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교인이라 하더라도 신분과 처지에 따라 계급 갈등을 겪었던 거죠. 식민 지배와 전쟁 등이 개입되면서 이런 불화가 증폭됩니다.”
이 작은 진산 지역만 해도 교회의 분리 개척과 분열 개척 등이 혼재한다.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은 어느 지역이나 비슷하다. 현재 인구 350여명에 불과한 지방리만 해도 교회가 세 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탄의 책략 같은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거예요. 이방신이 유독 많은 이곳에서 신앙심이 더 깊어지는 이치와 같죠. 회당은 형제의 하나 됨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품 같은 곳입니다. 진산의 구령운동이 그러했습니다.”
진산=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한국의 성읍교회-진산 지방장로교회] 순례길 ‘실학路’ … 신·구교 박해 이겨낸 성지
입력 2014-06-28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