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기억 성형술

입력 2014-06-21 02:02
누구나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린 그것이 꽤나 정확하다고 확신한다. 마치 하드디스크에 고이 저장돼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낼 수 있는 컴퓨터의 데이터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억에 대한 이런 통념을 완전히 뒤집은 실험이 1990년대 미국에서 행해졌다. 기억 연구의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박사의 ‘쇼핑몰에서 길을 잃다’라는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로프터스 박사는 24명의 피실험자를 모집한 후 그들의 가족에게서 들은 어린 시절에 관한 실제 추억 세 가지와 그들이 쇼핑몰에서 길을 잃었다는 가짜 기억 한 가지를 적은 소책자를 준비했다. 그리고 피실험자들에게 그 책을 읽게 한 후 자신이 직접 기억하는 내용을 말하라고 지시했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되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놀랍게도 피실험자의 25%가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기억을 떠올렸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기억이 너무 상세하다는 점이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파란색 옷을 입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등등 길을 잃었던 쇼핑몰의 구체적 상황과 당시 자신의 심리 상태를 생생하게 되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기억의 재응고화 가설에 의하면,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억은 콘크리트 표면에 쓴 글자와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서 콘크리트가 굳어져야 장기적인 기억이 형성되고,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다른 글자를 쓰거나 표면을 쓸어버리면 본래의 글자가 지워진다. 이처럼 콘크리트가 굳어지는 과정, 즉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응고화’라고 하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게 ‘재응고화’다. 오래된 기억이라도 일단 의식 속으로 기억을 인출하면 그 기억이 다시 응고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다시 인출된 장기기억은 일시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있다가 새로 저장된다는 것. 그 틈을 타 교란하면 쇼핑몰 실험처럼 기억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재응고화 가설이다.

최근엔 미국 연구진이 빛을 이용해 신경을 활성화시키는 기법으로 실험쥐의 공포 기억을 무한정 생성하고 지우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기억을 선별적으로 삭제하고 심는 연구결과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있어 몇 년 후면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개개인의 추억도 성형미인처럼 모두 아름다운 것들로만 채울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성규(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