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주저앉아 슬피 울며 하늘을 내신 하나님께 여러 날 단식하며 기도를 올렸다.”(느 1:4)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읍 형편을 듣고 통곡했다. 그리고 단식기도했다. 유배지 바벨론에서 살아 돌아온 예루살렘 백성 때문이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나이다”(느 1:3) 하는 얘기를 듣고서였다. 느헤미야는 성읍 재건에 나서 BC 444년 낙성식을 가졌다.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수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고 전하고 있다.
한국의 성읍은 구한말을 전후로 일본의 능욕을 받아 역사성을 잃었다. 그러나 능욕은 백성을 섬기지 않은 권력이 자초한 일이었다. 연재를 시작하는 ‘한국의 성읍교회’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읍을 재건해 가는 기독교문화지리학이다. 단지 성읍이 갖는 건축학, 도시공학이 이 아니라 성읍의 역사성과 종교성을 짚고자 기획했다.
한국 기독교사는 1884년 옛 성읍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하여 무너진 성읍이 기도로 중수(重修)됐고, 한국은 지구촌의 복음 전파 전진기지가 됐다. 하지만 이즈음 ‘어린아이도 즐거워’하던 그 성읍에서 탄식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탐욕한 교계 지도자와 맘모니즘에 빠진 교인 일부가 거룩한 성읍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성읍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와 같은 지혜로 성읍과 성전을 세우려는 한국 교회의 간절한 기도를 담아내고자 한다.
서울에서 경남 진주의 진주교회를 찾아가는 길은 로마로 향한 길처럼 거침이 없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니 덕유산과 지리산 허리를 끼고 길이 이어졌다. 1950년 전후 빨치산이 출몰한 준령은 ‘콘크리트 괴물’에 산허리가 싹둑 잘렸다. 차로 3시간30여분. ‘진주라 천리길’로 표현되는 오지는 이제는 노래나 영화로만 남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진주 사람들은 이 고속도로가 생긴 후 “부산 갈 바에 서울 간다”는 말을 할 정도로 ‘천리길’ 오지에서 벗어났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 만에/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진주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가라/진주 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우당탕탕 빨래하는데…’라는 작자 미상의 민요 ‘진주난봉가’에 나타난 ‘설움’ 또한 옛말이 됐다.
그 ‘진주 남강’ 절벽 위에 진주성읍이 세워졌다. 백제시대 거열성 터였으며 고려 때 읍성 축조가 본격화됐다. 촉석성이라고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700여명의 군사로 2만여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현장이 진주성읍이기도 하다. 하지만 왜는 6만∼7만명의 병력을 투입, 끝내 진주성을 무너뜨렸다. 의기 논개가 그 분을 참지 못해 촉석루에서 열린 승전 연회에서 왜장을 끼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진주성읍, 우상의 땅 안에 교회가 들어서다
진주교회는 촉석루에서 1.5㎞ 떨어진 비봉산 아래에 위치한다. 현대적 개념의 성읍, 즉 구시가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교회는 1905년 호주 의료선교사 휴 커를(한국명 거열휴·1871∼1943)이 봉헌했다. 진주 및 경남 서부 일원 첫 교회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은 조선의 모든 성읍이 사실상 일제에 의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황성옛터’가 되어 잡풀만 무성한 채 방치됐다.
1928년 발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따르면 ‘선교사 거열휴와 조사 박성애가 전도하야 본군 북문 내에 초가삼간을 예배처소로 정하고 회집 예배하였다’라고 기록됐다.
커를은 당시 진주 상황을 이같이 묘사했다.
‘이때 사회와 국가는 캄캄한 그믐밤 같고 또한 질서가 없는 고로 심히 문란하고…연락(宴樂)에 취한 탕자들은 기생집에 방황 골몰하여 가산을 탕진하니 창기가 많으므로 파리의 수효에 비교하며…교만하고 사치함은 제2의 고린도성이라 할 수 있고 사신우상(邪神偶像)을 숭배하는 악습은 성행되어 아덴성에 지지 아니하더라…사망의 길로 밀려가는 것을 어찌 다 형언하리오.’
우리에게 불편한 이 시선은 우상을 섬기다 타락한 성읍임을 말하고 있다. 그의 눈에 고린도성읍과 진배없었다. 커를이 진주에 갔던 해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개칭해 편입시켰다. 이완용 등 을사오적은 일본 공사 히야시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희희낙락이었다. 천리길 진주라 해서 중앙정부와 다를 바 없었다. 진주 토호세력도 마찬가지로 수탈과 탐욕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같이 불편한 타자의 시선이 나올 법했다. 조선의 성읍 어디서고 매관매직이 횡행했다. 백성은 하늘의 구원만을 바랐다.
이듬해 6월 커를은 선교보고에서 ‘매주일 3차례 예배를 드리며 평균 20명의 남자와 7명의 부녀가 참석한다’고 적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노방전도를 했다. 매서인(성경을 판매하며 복음을 전하던 사람)도 전도에 큰 역할을 했다.
커를은 1906년 11월 첫 예배당을 준공했고 1908년 하동읍교회, 1909년 동금리교회(현 삼천포교회)와 북변교회(현 남해읍교회) 등으로 선교 지평을 넓혔다. 커를이 의료선교사였던 만큼 시약소에서 시작한 의료선교는 1913년 진주지역 최초의 민간병원 배돈병원 설립에 이른다.
사회 신분에 대한 계급의식이 강하고, 경남 지방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곳이기도 한 진주성읍에 복음은 조심스럽게 퍼졌다.
진주, 교육도시가 된 배경에 진주교회
“일제 강점기 진주교회사는 정리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역사관을 열어 1200여명 출석 교인에게 자랑스러운 교회사를 배우게 합니다. 진주 인구가 30만 정도 되는데 그중 10만여명이 교육과 관련한 인구입니다. 대학만 6개죠. 그런데 진주가 교육도시가 된 배경에는 진주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난 후 학교를 세웠으니까요.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등이 있었고 교역자를 양성하는 경남성경학원도 있었습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 모교입니다. 진주기독유치원도 1916년 개원했고요.”
지난주일 역사관을 안내하던 조헌국(67·전 진주시 교육장) 은퇴장로는 경남서부 기독교전래사를 조곤조곤 전했다. 3대째 진주교회를 섬기는 가문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교육의 힘은 진주지역 3·1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 수만명이 조선의 독립을 외쳤다. 일본 고등경찰관계적록은 ‘주모자들이 진주 장날을 즈음하여 예수교예배당(진주교회)에서 알리는 정오 종소리에 맞추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했는데 1만여명이 모였다’고 전한다. 부산경남3·1운동사는 노동자, 걸인, 기생 등이 참가했고 수백명이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백정, 양반과 예배…형평사운동 배경
“진주교회가 신앙의 본모습을 보여준 엄청난 사건이 있는데 바로 백정선교입니다. 천인인 백정을 입교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존비귀천의 차별을 없앤 거죠. 당시 진주 백정은 옥봉과 서장대 아래 350명 정도가 모여 살았거든요. 양반 교인 일부가 본당 합석예배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맞은 커를 선교사를 대신한 머리 라이얼(라대벽) 선교사 등의 설득과 스콜스, 켈리라는 두 여선교사의 신앙적 권면으로 우여곡절 끝에 합석예배가 이뤄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1923년 형평사운동의 배경이 됩니다. 성령님이 도운 인권운동이었죠. 이러한 흐름은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이어졌고 교회당이 폐문됩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한 자랑스러운 폐문이었죠.”
이 교회 이지오(83) 은퇴장로는 진주교회 역사의 대언자 같은 분이다. 적어도 해방 이후 진주에서 일어난 일들은 사진 찍듯 기억해 낸다.
이 장로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 진주사범학교(진주교대 전신) 5학년이었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그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밭에서 숨어 살았다. 그의 집에선 교회가 보였다. 지금의 진주교회 인근은 논밭이었고 낮은 초가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진주를 접수한 인민위원회는 유화책의 일환으로 주일 예배를 볼 수 있다며 회유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그들의 ‘반동분자’ 검거를 위한 술책이었다. 이 장로의 증언.
1950년 8월, 예배당이 폭격에 무너져
“그날이 수요일 낮이었어요. 저녁에 수요예배가 예정되어 있었죠. 한데 비봉산 너머서 미군기 한 대가 낮게 날아오더니 교회당에 폭탄 딱 한 발을 떨어뜨렸어요. 정확히 첨탑에 떨어져 적벽돌교회가 벽체만 남기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십자가가 불에 타고 있었죠. 저는 앞뒤 안 가리고 교회로 달려가 망연자실 바라다 봤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주일. 회당 예배가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진주 일원 10여곳 교회에선 주일예배가 올려졌고 인민위원회는 이를 미끼로 대대적 교인 검거에 나섰다.
“지금도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어요. 어떻게 미군기가 교회 건물만 정확히 포격하고 사라지느냔 말이죠. 시내 어느 곳에도 폭탄 투하를 하지 않았거든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죠. 교회가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교인이 납북 등의 화를 면했습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전소된 교회당에서 가마니를 깔고 예배가 재개됐다. 59년에 가서야 교회당은 완전 복구될 수 있었다.
경남 서부 장자교회, 성읍의 역사를 다시 쓰다
50년대 진주교회는 한국교회의 분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예수교장로회는 고신파와 총회파로 갈리고, 총회파는 다시 예장파와 기장파로 갈리고, 예장파는 다시 승동 측과 연동 측으로 갈려 오늘날 승동 측은 합동, 연동 측은 통합 교단이 됐다. 진주교회는 현재 합동 측이다. 해석에 따라 진주의 장자교회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어찌됐든 진주교회를 빼고 경남 서부 선교 109년을 설명할 수 없다.
2006년 부임한 송영의(50) 목사는 2011년 6층 규모의 비전관 개관, 2012년 진주기미독립만세 기념교회 종탑복원, 2013년 광림학교 및 배돈병원 사적기념비 제막 등을 통해 역사교회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있다.
“진주시 복음화율이 5%라고 합니다. 실제는 3% 정도 될 겁니다. 낮은 수치죠. 보수성이 강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견고한 성읍이 말씀으로 변화됐듯, 비전관에서 이뤄지는 교회교육을 통해 진주가 제2의 변화를 겪을 겁니다. 교회교육이 사회교육을 선도할 때 부흥이 있었습니다. 진주교회는 교회교육을 통한 비전을 세우고 있습니다.”
진주=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한국의 성읍교회-진주교회] 백정, 양반과 합석 예배… 인권에 눈뜨다
입력 2014-06-14 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