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도사 ‘베릴’ 조건희 ①

입력 2025-12-02 23:44

2일 강원도 원주의 한 카페에서 ‘베릴’ 조건희를 만났다. 조건희는 지난달 18일 디플러스 기아와 계약이 종료된 뒤 자유계약(FA) 신분으로 전환됐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를 만나서 최근 이적시장 동안 어떤 고민을 했으며, 심사숙고 끝에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들어봤다.

아울러 2017년부터 걸어온 그의 프로게이머 커리어를 다시 돌아봤다. ①편에서는 그가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시점부터 처음 LoL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한 2020년까지의 얘기를 다룬다. ②편에서는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담원 기아부터 DRX를 거쳐 KT 롤스터까지의 여정을 다룰 예정이다.

-오프 시즌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지난 9월 LCK 플레이오프 패자조 T1전에서 진 뒤로 잠시 휴식을 취했고, 다시 ASI에 나갔다가 결승전에서 아깝게 진 뒤로 다시 쭉 쉬었어요. 지인들을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같이 놀기도 하고, 시즌 중에 못 해봤던 다른 게임도 하면서요.”

-새 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안 들립니다. 휴식을 취할 예정입니까.
“사실상 2026시즌이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선수로 이룰 수 있는 게 많겠다 싶어서 에이전시와 함께 새 팀을 찾아봤는데 당장은 제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힘들겠다 싶더라고요. 아직 100% 확정된 건 아니지만 2026시즌은 우선 개인방송을 하면서 시작할 거 같아요.”

-스플릿 2나 스플릿 3에 맞춰 현역으로 복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까.
“최근에 베테랑 선수들이 많이 은퇴했잖아요. 올해 ‘피넛’ 한왕호 선수도 입대 때문에 LCK 무대를 떠나게 됐고요. 리그에 가능성 있는 신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분명 베테랑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점도 여전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팀에서 불러준다면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저는 그때그때 생각이 바뀌는 기분파예요. 당장은 미래의 일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않으려고요.”

-디플러스 기아에서 보낸 2025시즌은 어땠습니까.
“‘쇼메이커’ 허수와는 예전에 같이 해봤잖아요. 올 시즌도 그때와 느낌이 비슷했어요. ‘시우’ 전시우와 ‘루시드’ 최용혁은 신인이거나 사실상 신인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정말 잘해줬어요. 그리고 ‘에이밍’ 김하람이 적극적으로 게임을 설계해주고 주도적으로 운영해줬죠. 1년을 통째로 놓고 보면, 이길 수 있던 경기들을 진 게 아쉬워요. 그 경기들을 잡았다면 결과적으로 많은 게 달라졌을 거 같은데….”
LCK 제공

-어떤 경기들이 아쉬웠습니까.
“우선 LCK컵 한화생명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풀세트 패배를 당했죠. LCK 정규 시즌 2라운드 농심전을 2대 0으로 잡았다면 타이브레이커를 안 치렀겠죠. KT와의 타이브레이커에서 이겼다면 또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LCK 플레이오프 2라운드 T1전 5세트도 못 이겨서 아쉬워요. 패자조에서 T1과의 리매치가 펼쳐졌는데 유리했던 2세트를 이겼더라면 또 어땠을까요. 그때 교전을 적극적으로 열었다면 이겼을 거 같은데 그 경기가 정말 많이 아쉬워요.”

-T1전을 앞두고 팀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자신 있었어요. 2세트에서 잔나를 꺼낸 것도 스크림 성적이 좋아서였어요. 처음에는 브라움 외에 쓸 만한 루시안 파트너를 찾다가 잔나가 떠올라서 연습했어요. 원래 바드 상대로 준비했던 픽인데 상대가 라인전 약한 알리스타를 골랐으니까 거기서 쓸 만하다 싶었고요. 잘 풀린 판이었은데 아쉽게 됐죠. 스크림 데이터상으로는 잔나가 루시안이나 코르키와 쓸 때 성적이 좋았어요.”

-4세트에서 람머스를 고른 것도 의외였습니다. 준비한 픽이었습니까.
“스크림에서 탱커 서포터 픽이 다 빠지면 뭘 해야 할지 의논하다가 람머스를 찾았어요. 그날 진 건 상대의 사일러스 정글을 예상 못 한 것 때문이기도 하고, 미스 포츈·레오나를 라인전에서 찍어누르려고 했는데 빠른 갱킹 때문에 계획이 어긋나서도 있어요.
아이템 트리에 대한 고민도 좀 있었죠. 당시 서포터가 1코어로 구원을 가는 메타였는데 람머스와 구원이 안 어울리니까요. 그렇다고 가시 갑옷을 가자니 팀적으로 시너지가 없고. 그래서 솔라리를 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가시 갑옷을 사면 어땠을까 싶어요.”

-2년 연속 월즈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했습니다. 아쉬움이 크겠습니다.
“아쉽죠. 작년에는 1승, 올해는 2승이 부족해서 월즈행 티켓을 놓친 거니까요. 경기 전에 김대호 코치님과도 얘기했던 건데 T1을 이긴다면 왠지 3대 0으로 이길 거 같았어요. 우리는 흐름이 좋고 상대는 흐름이 나빠 보였거든요. 결국 큰 무대 경험 차이로 승패가 갈렸던 거 같아요.”

-조 선수의 커리어를 되돌아봅시다. 담원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아 프로게이머가 됐죠.
“시즌 4~5를 챌린저로 마무리했는데 시즌 6 때는 LoL을 거의 안 했어요. 오버워치를 더 많이 했죠. 그러다가 그해 월즈 준결승전을 보는데 다시 LoL이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시즌 종료까지 20여일 남은 상황에서 잠도 안 자고 솔랭만 돌렸어요. 그때 한 500판은 했을 거예요. 죽어라 게임만 해서 운 좋게 딱 200등으로 챌린저 마감을 했죠. 그랬더니 프로 제의가 오더라고요. 원딜로 프로 도전해볼 생각 없냐고. 마침 대학교도 휴학 중이었겠다, 앞으로의 진로도 명확하게 생각해둔 바 없었고, 한번 도전이나 해보자고 마음먹었던 게 제 프로게이머 커리어의 시작이었죠.
LCK 제공

-원딜로 시작해서 서포터로 포지션을 변경했습니다.
“원딜 시절엔 사전 데이터가 없는 플레이를 과감하게 시도하지 않는 성향이었어요. 원딜은 원래 과감해야 하는데 그런 걸 못 하더라고요. 2017년 향로 메타에서 ‘룰러’ 박재혁 선수가 우승하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정도는 해야 우승하는구나. 나는 저렇게까진 못할 거 같은데.’ 그래서 빠르게 원딜을 포기하고 서포터로 진로를 바꿨어요.”

-‘데프트’ 김혁규를 만나 벽을 느끼고 포지션 변경을 했다는 일화도 떠돌던데요.
“혁규 형을 만나서 벽을 느꼈던 건 2014년의 일이에요. 그때도 아마추어 중에서는 가장 잘하는 축에 속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죠. 새벽 솔랭에서 혁규 형을 5판 연달아 만나서 다 졌어요. 아마 솔랭 점수를 한 90점, 100점 정도 내줬을 거예요. 정글러가 있는 척 움직이는데 그 무빙부터 남다르더라고요. 그때 프로와 아마추어의 벽을 한 번 실감했죠.”

-서포터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 적응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포지션 변경에 대한 고민은 한 2~3주 정도 했어요. 결정 전날 서포터로 스크림을 해봤는데 결과가 좋았고요. 포지션을 바꿨다고 해서 바로 경기에 출전하진 못했어요. 당시 담원에 주전 서포터가 따로 있었거든요. LCK 4대 서포터라 불리던 ‘마타’ 조세형·‘코어장전’ 조용인·‘고릴라’ 강범현·‘울프’ 이재완 선수의 대회 영상을 보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어요.
가장 많이 참고한 건 ‘마타’ 선수였어요. ‘슈퍼팀’ KT가 LCK를 우승하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당시에 ‘마타’ 선수가 선턴을 잡으면 상대 정글에 와드 3개를 다 박고 빠르게 귀환해서 혼자 와드 6개를 든 것처럼 플레이를 했어요. 팀은 서포터가 준 일방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 정글러의 위치를 먼저 찾고, 그 위치를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상대 정글러의 시간을 낭비하게 했어요. 그런 걸 본보기로 삼았죠.”
라이엇 게임즈 제공

-2019년 담원이 LCK로 승격했고, 주전 서포터 자릴 꿰찼습니다.
“2019년 초반까지도 거의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어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스프링 시즌 1라운드 후반부에 LCK 데뷔전을 치렀을 거예요. 저는 스크림에 못 들어갔을 때도 솔로 랭크를 돌리기보단 스크림을 관전했어요. 잘하는 팀들은 어떻게 플레이하는지를 유심히 봤어요. 스프링 시즌은 플레이오프에서 킹존 드래곤X에 져 탈락했던 걸로 기억해요. 허무하게 졌는데 나쁘진 않았어요. 승격 후 첫 시즌이니까 이 정도면 잘했다고 생각했죠.”

-월즈에도 진출했죠. 8강에서 G2를 만나 졌습니다.
“사실 G2 상대로 스크림 성적은 더 좋았어요. 그런데 큰 경기장에서 실전으로 붙으니까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심지어 그때 G2는 최전성기였어요. 골든로드에 도전하는, 결과적으로는 ‘우우우준’으로 끝났지만 그땐 ‘우우우’까지 써놓고 마지막 우승에 도전하던 시기였죠. 지금 생각해도 2019년의 G2는 정말 강한 팀이었어요. 미드 푸시를 중요시해야 하고, 미드가 돌아다니면서 득점을 올리는 게 중요한 메타였는데 그걸 G2가 가장 먼저 찾았고 또 잘했죠. 그래도 첫 월즈에서 거기까지 건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쉬움과 만족감이 공존했던 해였습니다.”

-2020년이 전성기의 시작이었죠. 스프링 시즌부터 예감이 좋았습니까.
“시즌 준비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KeSPA컵에선 DRX에 0대 2으로 져서 조기 탈락했을 거예요. 스프링 시즌은 힘들게 치렀어요. 지고 이기고를 반복하고, 꾸역꾸역 승리를 따내서 플레이오프에 갔던 기억이 나요.”

-서머 시즌은 어땠습니까.
“서머 시즌은 스크림부터 정말 잘 됐어요. 그래서 그런지 실전도 정말 잘 풀리더라고요. 1라운드를 7승2패로 마무리했는데 패배한 DRX전과 젠지전도 한 끗 차이였어요. 결국 2라운드 전승을 하면서 자신감이 확 붙었죠. 딱히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에요. 1라운드 때 ‘픽에 맞는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피드백이 나왔고, 2라운드부터는 픽의 장단점을 생각하며 플레이한 게 다였어요.”
LCK 제공

-담원이 해당 시즌을 우승할 거로 예상했습니까.
“우승을 낙관하진 않았어요. 젠지가 무서웠어요. 담원이 스크림에서 유독 젠지에 약했거든요. 사실 저는 ‘젠지만 만나지 말자’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결승에서 DRX를 만나서 3대 0으로 이겼어요. 1세트를 이긴 게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원래 담원이 바텀에 힘을 주는 조합을 선호하지 않았는데 그날 그걸로 이기니까 이후 세트 밴픽까지도 영향이 갔죠.”

-당시 담원과 조 선수가 다른 팀들보다 어떤 걸 더 잘했던 걸까요.
“기괴한 픽이 하나 있었죠. 판테온이요. 담원은 판테온을 다른 팀들보다 먼저 연습했어요. 서머 시즌 전부터요. 판테온으로 6레벨을 찍고 궁극기로 사이드 압박을 주거나, 챔피언의 전성기 타이밍을 이용해서 초반 교전을 열거나 했죠.
교전도 과감하게 열었어요. 운영도 2019년 G2의 방식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고요. 미드가 자기쪽 사이드 라인을 쭉 밀어놓고 탑라이너한테 붙어서 3-2로 미는 운영이라든지. 다른 팀들의 장점을 잘 흡수하고 챔피언의 특성도 잘 살렸던 거죠. 그리고 탑 캐리력이 좋은 메타였어요. ‘너구리’ (장)하권이가 활약하기 좋았죠.”

-LCK 우승의 기세를 살려 월즈까지 우승할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까.
“월즈도 우승을 낙관하진 않았어요. LPL의 TES와 JDG가 아주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거든요. 골든로드를 아쉽게 놓쳤던 G2도 있었고요. 결승에 올라온 쑤닝(SN)은 다크호스로 평가받던 팀이었어요. 그런데 대회 초부터 양대인 코치님이 ‘쑤닝이 심상치 않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몇 주 있다가 결승에서 만나게 되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쑤닝은 자신들만의 무기를 정말 잘 쓰는 팀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그들만 쓰는 몇 가지 챔피언이 있었는데 그걸로 이기는 방법을 잘 알았어요. 3세트를 힘들게 이겼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하권이가 케넨으로 정말 잘해줬죠. 그 세트가 쑤닝도 필살기를 쓴 게임이었거든요. 거기서 이겨서 4세트까지 물 흐르듯 잡을 수 있었던 거예요.”
라이엇 게임즈 제공

-정말 다크호스였습니다. ‘빈’ 천 쩌빈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결승전이기도 했지요.
“사실 ‘빈’ 선수는 월즈 전부터 선수들 사이에서 유명했어요. 솔로 랭크에서 ‘러브 카밀’이란 소환사명을 썼는데 조용하게 잘하더라고요. 르블랑·에코를 잘했던 ‘띵구(thgink9)’, 지금은 ‘나이트’로 불리는 줘 딩 선수와 ‘빈’ 선수는 그때부터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원주=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