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반추하는 89세 작곡가의 엔딩파티… “모든 날이 은혜였다”

입력 2025-10-26 07:54 수정 2025-10-26 08:40
배우 신애라씨가 아버지 신영교씨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 하이패밀리 제공

한국교회가 죽음을 넘어 부활의 언어로 장례 문화와 신앙의 끝을 재정의하는 움직임이 퍼지고 있다. 죽음 교육을 생명과 감사의 신앙훈련으로 전환하고 복음적 가치를 담은 장례 모델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양평 잔디밭 위의 엔딩파티

산과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푸른 잔디밭.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야외 공간에 50여명의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훔쳤고 누군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흑백 결혼사진부터 손주들과 함께 찍은 최근 사진까지 한 사람의 인생이 켜켜이 쌓인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이날 모임의 주인공은 빨간 넥타이에 중절모를 차려입은 신영교(89)씨. 구순을 바라보는 그는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감사를 전하며, 때로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최근 경기도 양평 하이패밀리에서 진행된 ‘엔딩파티’의 모습이다.

하이패밀리 제공

배우 신애라 씨의 부친이자 동요 ‘시소’의 작곡가인 신씨는 살아생전 가족들과 그간의 삶을 돌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

잔디밭 위 대형 스크린에 신씨가 살아온 인생을 담은 영상이 틀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애니메이션과 사진으로 구성된 영상은 작곡가이자 지휘자, 교회 봉사자로 살았던 삶, 부인과 함께 걸어온 여정 등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90년의 세월을 그가 남긴 동요 ‘시소’에 빗대어 풀어낸 한 편의 드라마였다. 영상 속에서 ‘시소’의 가락이 흐르자 가족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엔딩파티'의 주인공 신영교씨. 하이패밀리 제공

신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돌아보면 모든 날이 은혜였다. 잠깐 주저앉았던 순간조차도 저를 살리신 손길이 있었다”며 “충만한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끝내 노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했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지난달 소천한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제26대 감독회장을 지낸 신경하 감독의 장례식은 한국 기독교 장례 문화의 전환점으로 회자된다. 빈소도 조화도 부의금도 없었다. 대신 조문객들에게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가 대접됐다.

생전 신 감독은 훗날 자신의 장례식에 찾아올 조문객들을 위한 장례 식사비용을 미리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문객들이 부담 없이 조문할 수 있도록 오히려 그들을 대접하고 싶었던 고인의 마지막 배려였다.

지난달 서울 아현교회에서 열린 신경하 감독의 장례식. 국민일보DB

장례를 준비한 김종훈 목사는 “신 감독님은 평소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며 죽음을 준비했던 ‘삶과 죽음이 일치하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5월 서대천 홀리씨즈교회 목사는 95세 모친을 천국으로 보내며 ‘천국 환송 예배’를 드렸다. 서 목사는 부고장에 “이 시간은 이별이 아닌 기쁨의 잔치로 기억되길 소망하오니 검정이나 회색이 아닌 밝고 따뜻한 복장으로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적었다.

실제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은 검은 상복이 아닌 하늘색 정장과 원피스로 조문객을 맞았다. 조문객들도 밝은 색상의 옷을 입고 찬양과 감사로 예배를 드렸다. 그것은 장례가 아니라 부활의 축제였다.

언어가 문화를 바꾼다

최근 기독 장례문화를 담은 영화 ‘투헤븐’을 개봉한 김상철 감독은 장례 개혁의 핵심을 ‘우상숭배 청산’으로 꼽는다. 검은 상복, 일제강점기 시절에 유래된 완장 문화, 제사, 삼베옷 착용 등 유교적 전통이 기독교 신학과 충돌함에도 친족들의 압력과 관습의 힘으로 흡수됐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특히 언어의 변화가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죽음을 뜻하는 ‘고(故) 김상철’ 대신 부활 신앙을 담은 ‘하늘 시민 김상철’처럼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선포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장례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며 “검은 상복과 완장을 벗고 조상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장례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신경하 감독 장례식에서 장례준비위원장인 김종훈 목사는 “기독교적 죽음은 2차원의 삶에서 3차원의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며 “아이가 세상으로 나올 때 축하하듯 신앙인은 천국에 대한 확신으로 ‘천국 환송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기독교적 해석을 강조했다. “단순한 죽음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성찰하고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영적 각성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 즉 사명을 확인하게 됩니다.”

교회가 장례의 주체로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는 ‘고인이 없는 비대면 장례’를 가장 큰 문제로 지목했다. 장례식이 3인칭의 죽음을 1인칭의 죽음으로 전환하는 영적 각성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창세기 야곱의 사례를 들었다. “야곱은 죽음 직전 사전 장례 의향서를 발표하고 자녀들에게 축복하며 죽음의 계획을 완성했습니다. 장례는 복음과 치유, 가족의 화목을 위한 설계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교회형 장례 플랫폼 '레스텔'. 국민일보DB

하이패밀리는 환경 보호를 위한 ‘녹색장례’, 감염병 예방을 위한 ‘보건장례’, 고인 중심의 대면 장례를 지향하는 ‘선진장례’ 비전과 함께 항온·항습·항균 기능을 갖춘 교회형 장례 플랫폼 ‘레스텔’을 선보였다.

송 목사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다루었던 가장 큰 미션은 혼례와 장례였다”며 “교회는 ‘죽음 학교’를 운영해 신자들이 죽음을 충분히 성찰하고 준비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아영 박윤서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