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강아지똥’엔 누가복음이 있다?

입력 2024-07-09 10:56
'강아지똥' '몽실언니' 같은 주옥 같은 작품을 남기고 2007년 세상을 떠난 아동문학가 권정생. 국민일보DB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 흰둥이는 아직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강아지똥이 되겠습니다.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금방 식어버렸습니다. 강아지똥은 오들오들 추워집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동화 ‘강아지똥’은 작가 권정생(1937~2007)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동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자신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 여기던 강아지똥은 꽃을 피우기 위해 거름이 필요하다는 민들레 싹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비가 오던 날, 강아지똥의 몸은 자디잘게 부서지고 그렇게 땅속에 스며든 강아지똥은 민들레 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이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이 동화에 누가복음이 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의 논문이 나왔다. 바로 정덕희 한남대 기독교학과 교수가 최근 학술지 ‘문학과 종교’에 발표한 ‘누가복음을 통해 권정생 작품 읽기’다.

알려졌다시피 누가복음은 세상의 소외된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가장 진하게 묻어나는 복음서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서(The gospel for the poor)’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 누가복음엔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의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고, 6장 20절엔 이런 말씀도 나온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 같은 누가복음의 메시지가 ‘강아지똥’에 가미돼 있음은 이 동화의 머리말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권정생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부자의 문 밖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분명히 자기는 가장 불쌍한 거지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입고 살던 부자는, 오만스럽게도 자신이 거지임을 깨달을 줄 몰랐기 때문에 영원한 불구덩이 속에서 괴로운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 교수는 논문에서 누가복음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고 ‘강아지똥’ 출간 당시(1969년) 권정생의 팍팍했던 삶을 들려준 뒤 “가난과 비천의 상징”인 강아지똥이 권정생의 분신이었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누가복음과 ‘강아지똥’이 사실상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소외된 자들의 소중함을 선포했듯 권정생도 ‘강아지똥’을 통해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들레로 거듭나는 동화의 결말도 예수님의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정 교수는 “예수 죽음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이 부여되었듯, 강아지똥의 희생은 새로운 열매로 승화된다. 이 모든 드라마를 전개하는 기저에는 누가복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정생은 젊은 시절 가난과 폐결핵 탓에 힘든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강아지똥’이 출간될 때는 경북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교회 종지기로 살고 있었다.

정 교수는 9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누가는 가난한 자가 복을 받는 세상을 꿈꿨는데, 권정생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포착해 연약한 자가 경험하는 새로운 세상을 아름답게 그려냈다”며 “누가복음의 역설을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표현한 사람이 우리 문학계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