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비긴즈[EP1] 농부, 거칠고 마른 땅을 보다

입력 2023-02-14 16:19 수정 2023-02-14 17:01

나는 개척자 ‘Y’다. 전도사 16년, 부목사 3년. 목양에 관한 나의 경력을 소개하는 단 한 줄의 기록은 이렇다. 그 한 줄에 한 겹을 더하려는 여정은 꽤 복잡다단하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복잡함은 주님과의 동행을 더 극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고, 도무지 제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퍼즐 조각 같은 순간들 또한 더 견고하게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뤄가기 위한 전공 필수 강의였음을 고백한다.

그 여정에 첫걸음이 떼어진 건 2021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코로나는 그 끝을 알려줄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은 자기 생각들을 쏟아 놓았다. 무엇이 정확한지 모를 정도로 백신 증상 예방 등의 정보가 넘쳐났다. 교회도 방역 대상이 됐다. 19명? 99명? 집합 제한 숫자가 바뀔 때마다 혼돈이 찾아왔고 교역자들은 예배 인원을 맞추느라 동분서주했다. 교육관에 한 명이라도 더 예배드릴 수 있도록, 예배당에 한 명의 예배자라도 더 예배드릴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작은 교회 큰 교회 할 것 없이 유튜브로 예배 송출에 매진했다. 미자립 교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했고 방역과 돌봄의 사각지대가 돼버렸다. 그런 상황을 재빨리 감지한 이웃 교회와 교단은 예배가 멈추지 않도록 손을 건넸고 맞잡아 준 손에 용기를 얻은 공동체는 안간힘을 쓰며 영적 울타리를 지켰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같은 마음을 먹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대통령 퇴진 구호가 터져나왔고 교회를 박해한다고 소리를 쳤다․ 이에 맞물려 ‘동성애 이슈’까지 머리가 아팠다. 복음은 그 자체로 영원한 사귐인데 사죄만 요구했고 사퇴만 선포됐다. 강단에서, 길에서 어지러운 상황들이 벌어졌고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성도들은 이를 박해로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돼야 할 교회는 안팎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졌다.

한번은 수도권 한 지역에서 동성애 반대 집회가 열린다고 해서 교인들을 모집해 집회에 참석했다. 현장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가득한 시간이 될 것이란 기대가 나락으로 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도회로 모인다고 해서 갔지만 마이크를 잡은 분들은 하나같이 정치인들로 보였다. 분명 신분이 종교인인데 다들 국회의원 시의원 같아 보였다. 집회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줄곧 ‘대통령 탄핵’ 서명을 요구받았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가 빨갱이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와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는데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비겁하게 숨어서 집회가 언제 끝나나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다. 소신있게 말하지 않고 자리를 이탈한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보였다. 내 목소리는 사라졌고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불편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의 눈을 피해 도망하는 게 전부였다.

커피가 맛이 없다. 내가 맛이 없다. 너무 싱거웠다.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일까. 우리 주님이 원하는 일이 이것일까. 양분화 되는 사람들은 주사파 빨갱이들일까. 혼란스러웠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는데 내 것을 지키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지, 정말 잃어버리는 것이 있음에도 눈을 감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출애굽 공동체를 통해 주님께서는 목소리를 잃은 백성, 땅을 잃은 백성, 혼란 속에서 부르짖는 영혼들을 보시고 탈출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셨다. ‘개척(開拓)’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거친 땅을 일구어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듦이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교회가 쓸모없는 땅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옥토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목소리를 잃고, 땅을 잃은 백성들, 혼란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친 땅을 일구고 싶었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내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안다. 부교역자가 맡겨진 일만 잘하면 됐고 적당히 교회의 방향성과 밸런스를 맞추면서 일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임지를 옮길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지금처럼 똑같을 것 같아 자신이 없었다. 비겁하게 살 것 같아서 힘들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차에 교회에 일이 터졌다. ‘성도 치리’에 담임목사님이 눈을 감으셨다. 담임목사님이 결정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전도사님이 성도를 치리한 부분에 눈을 감고 오히려 두둔하셨다. 해당 성도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교회와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성도의 이야기는 듣지 않으셨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셨다. 성도의 눈물을 닦아줄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 교역자의 수고와 애씀에 대해 칭찬하셨다.

칭찬이 불편했고 부당했다. 눈물 흘린 성도가 설 수 있는 땅을 주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는 땅을 농사꾼의 마음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개척을 이야기했다. 혼났다. 쉽지 않음을 깨달았지만 마음 한편에 내가 하고 싶은 목회, 내가 꿈꾸는 공동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함께할 수 있는 땅을 마음 속에 품었다. (Y will be back!)




최기영 기자, 일러스트=이영은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