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국가 코스프레’ 탈레반, 앞에선 “보복 없어” 뒤에선 “자수 안하면 가족 죽일 것”

입력 2021-08-20 12:30 수정 2021-08-20 22:55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19일(현지시간) 탈레반기를 꽂은 차량을 타고 수도 카불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 탈레반은 카불에 밤 9시 이후에는 긴급상황을 제외하고 외출을 금하는 야간통행금지령을 내렸다. A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이후 앞뒤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탈레반은 ‘보복은 없다’는 공개 메시지를 보내면서 뒤에선 서방에 협력한 아프간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색출하고 있다. 또 카불을 떠나는 이들을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실제로는 카불 공항 입구를 장악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탈출 행렬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에선 “보복 없어”…뒤에선 블랙리스트 만들어 “가족 죽이겠다” 협박
지난 15일 수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지도부는 “복수하지 않겠다”며 사면령을 내리고 여성 인권 보호를 약속하는 등 정상국가로 보이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지만 현재로서는 공염불에 그치고 있는 모양새다.

1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탈레반이 아프간 정부 주요 인사들과 미군 등에 협력한 인물들을 체포하고 있다는 내용의 비공개 유엔 보고서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 보고서는 국제기구에 위험 지역 정보 등을 제공하는 ‘노르웨이 글로벌 분석센터(RHIPTO)’가 작성해 유엔에 제공한 것으로, 탈레반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군에 협력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지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색출하고 있으며, 이들의 가족까지 위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탈레반이 심문과 처벌을 원하는 아프간인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 탈레반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명단에 오른 이들이 자수하지 않는다면 “가족을 살해하거나 체포할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명단에 오른 인사들은 주로 군경, 정보기관 등 관계자다.

보고서엔 미국‧영국에 협력했던 아프간 정부의 한 대테러 요원이 지난 16일 탈레반 군사위원회로부터 받은 서한 사본이 첨부됐다. 이에 따르면 탈레반은 그에게 “당신이 미국·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당신 가족을 대신 체포할 것이며 이는 모두 당신 책임”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당신과 당신 가족은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근거해 처분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보고서 작성 책임자인 크리스찬 넬레만은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탈레반의 표적이 된 인물들이 상당히 많으며 (그들에 대한) 위협이 명백하다”며 “이들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으며 대규모 처형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아프간 정부 보안군 고위 관계자도 로이터에 “탈레반이 국가 안보 관련 비밀 문서를 확보했으며 정보 기관 인사들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고 말했다.

폭력으로 얼룩진 카불 공항 가는 길
탈레반의 앞뒤 다른 행보는 필사적인 탈출 행렬이 이어지는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앞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탈레반 관계자는 이날 로이터에 “외국인뿐 아니라 아프간인들에게도 안전한 출국을 보장하고 있다”며 “공항에서 아프간인, 외국인, 탈레반 대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말싸움을 방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지에선 공항으로 가는 길에 탈레반 대원들이 외국인, 아프간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도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탈레반이 공항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통행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총을 쐈다고 전했다. 이에 따르면 공항으로 향하던 호주인들은 검문소의 탈레반 대원에게 서류를 제출하고 비행기표가 있음을 밝혔지만 무기로 가격당했다. 호주인 레에다 무라비는 “공항 밖 도로가 혼란스럽고 폭력적”이라며 “탈레반처럼 보이는 이들이 민간인을 향해 총격을 가하며 떠나라고 위협했다”고 전했다.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19일(현지시간) 국외 탈출에 나선 한 가족(앞쪽)이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뒤쪽으로는 총상을 입은 한 주민 주변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현지 매체는 카불을 탈출하려는 인파가 공항 주변으로 몰리면서 총에 맞아 숨지거나 압사한 이가 최소 40명이며 부상자도 수십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전날 NYT도 탈레반이 공항 주 출입구를 봉쇄하고 소총을 발사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NYT가 공개한 영상엔 수백명이 몰린 공항 입구에서 탈레반 대원이 소총을 10발가량 발사하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정문 반대편으로 물러서는 모습이 포착됐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현지 미군이 공항 안전 확보에 주력하고 있어 민간인을 대규모로 공항으로 이동시킬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관도 아프간 체류 미국인을 향해 카불 공항까지 안전한 통행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밝혔다.

피로 물든 독립기념일… 공포정치 본격화
탈레반은 공포정치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주민들에 대한 억압은 점차 강해지고 있다.

아프간 독립기념일은 피로 물들었다. 외신들은 이날 아프간 곳곳에서 국기를 든 시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은 잘랄라바드 등 동부 지역에서 탈레반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최소 7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AP통신도 동부 코스트주와 쿠나르주 등에서 시위가 벌어져 탈레반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해산했다고 전했다.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재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19일(현지시간) 시민들이 아프간 국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아프간 곳곳에서 국기를 든 시위가 벌어졌고 탈레반이 이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 여러 명이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날은 아프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102주년이 되는 날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에 통행금지령까지 등장했다. 아프간 현지매체 카마통신에 따르면 탈레반은 이날 카불에서 오후 9시 이후 새벽까지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별도의 발표가 있을 때까지 유지될 예정이다. 탈레반은 시위가 벌어진 코스트주 등 일부 지역에서도 통행 금지 조처를 취했다.

거리 분위기도 달라졌다. 탈레반 조직원들은 시민들을 도둑으로 몰아 잡아들이고 있다고 전해졌다. 청바지를 입은 청소년들이 사라졌고, 식당에서 호객 행위를 위해 크게 틀어놓던 음악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체는 “아직 탈레반이 구체적인 새 법을 발표하진 않았지만, 시민들이 90년대 탈레반 정권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 조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