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 이들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따라붙는 수식어다. 참 길고 거창하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이들을, 하물며 ‘여성’을 보기는 쉽지 않다. ‘웃긴 여자’가 되고 싶어 일어선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3일 블러디 퍼니 멤버 김보은, 최예나, 최정윤, 고은별씨를 만났다.
블러디 퍼니는 기본적으로 멤버가 고정돼 있지 않지만,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7인이 있다. 오픈마이크(개인에게 5~10분간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것)를 할 때면 참여자가 20명까지 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부분 코미디언을 겸하는 ‘N잡러’들이다. 김보은씨는 연극배우, 최예나씨는 PC방 아르바이트, 최정윤씨는 통·번역 일을 하고 있다. 다양한 직업의 폭으로 코미디 소재의 범위가 넓어지는 건 덤이다.
왜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인가
최정윤: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면 5분 동안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웃기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 무대에 올라간 이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웃기는 데 실패해 ‘썰렁’해진 상황을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실수해도 괜찮다’는 걸 체득할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특별히 ‘여자들만의 코미디크루’를 만든 이유도 있다. 처음 오픈마이크에 갔을 때 남성이 스무 명 있다면 여성은 한두 명밖에 없었다. ‘프로페셔널’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성이 마이크를 잡고 자기만의 조크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블러디 퍼니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최정윤: 2018년에 처음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했다.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오픈마이크에 왔던 최예나님이 진행을 맡아주시고, 이따금 오던 2~3분이 합류해 2019년 1월 ‘그날’이라는 유료 공연을 했다. 공연 반응이 정말 좋았다. 그 이후 ‘그날’ 공연을 보고 흥미를 느끼신 분들이 오셔서 별도의 가입 절차 없이 느슨한 형태로 운영하게 됐다.
고은별: 엄마랑 그 첫 공연을 관객으로서 보러 갔었다. 평소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심이 있었다. 마침 공연 한 달 후에 여성만 참여하는 오픈마이크 행사가 있어서 ‘여자들만 있으면 좀 더 안전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참여했다. 그때 경험이 너무 재밌어서 멤버로 합류하게 됐다.
김보은: 저는 원래 연극을 했다. 공연할 수 있는 자리를 계속 찾아다니던 중 블러디 퍼니의 5월 공연을 보고 연락을 드렸다. 작년에는 ‘제3의 페미니즘 연극제’ 안에 ‘스탠드업 그라운드업’이란 공연으로 참여했다.
블러디 퍼니가 다루는 ‘조크’는 무엇을 소재 삼나
최정윤: 내가 무엇에 가장 꽂혀있는지가 조크에 많이 반영되는 것 같다. 저는 주로 한국 사회에서 ‘성(性)’을 어떻게 다루냐에 대해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저급하지 않으면서도 유익한 담론을 가져오려 한다. 미숙한 코미디언이라서 통쾌하고 재밌는 조크를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웃음)
고은별: 확실히 사람마다 주 소재가 다르다. 저는 코미디 자체도 좋지만 특히 여자들의 관점에서 다룬 코미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오픈마이크 무대에서는 여자들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그 자체로 시원하게 즐길 수 있다.
블러디 퍼니 활동을 여성운동의 일환이라고도 부를 수 있나
고은별: 그건 멤버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여성주의 운동을 한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진 않더라도 큰 흐름으로 봤을 때 여성운동의 일환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최예나: 저는 원래 코미디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견디기 힘들어서 나왔다. 최근에는 ‘조금 더 버텨볼 걸 그랬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여기서 좋은 여성들을 많이 만나 나만의 색깔이 담긴 코미디를 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여자니까 더 살아남아야지’라는 마음이 버팀목이 된다.
김보은: 전 꼭 여성운동을 위해 블러디 퍼니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좋아해서 하고, 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여성’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나.
김보은: 최근 다른 단체에서 주최한 오픈마이크 행사에 참여해 20분 정도 스탠드업코미디 공연을 했다. 현장에서 재밌게 조크를 하고 돌아왔는데, 이후 주최 측 유튜브 채널에 해당 영상이 올라가면서 문제가 됐다. 소위 ‘어그로’가 끌린 것이다.
최정윤: 영상이 노출된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그 사이 조회수가 갑자기 오르면서 악플이 달렸다. 심지어 저희뿐 아니라 오픈마이크에 참여한 다른 뮤지션들의 영상에도 ‘싫어요’를 누르더라. 괜히 주최 측이나 다른 분들께 피해 가는 게 싫어서 영상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김보은: 그런데 어떤 분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오픈마이크 풀 영상을 올리고, 다른 여성 뮤지션 영상들에 ‘왜 내리셨죠? 우리 블러디 퍼니가 부끄러우세요? 페미가 부끄러우세요?’ 같은 댓글을 달고 다녔다.
최정윤: 저희가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는 완벽한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찌르거나 상처주는 말은 안 하려고 하는데. ‘그냥 마음에 안 든다’ ‘너희는 조용히 해라’와 같은 시선을 피부로 느꼈다.
다른 때에도 악플을 많이 받나
김보은: 가끔 언론 인터뷰를 할 때 ‘너네가 안 웃기니까 너네끼리 하지’ 식의 악플이 달린다. ‘어디에 웃는지가 그 사람을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공감대’가 맞지 않으면 함께 웃기 어렵다는 말이다.
외모를 비하하는 악플도 많이 받아봤다. 외모 비하가 공격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저희가 유명인이 아니다 보니 디테일하게 욕하기 어려워서 외모로 욕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전 (외모 비하 악플에 대해) 창의성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좀 더 고민해봤으면 한다.(웃음)
기성 코미디도 상대방의 ‘외모’를 소재 삼는 경우가 많지 않나
김보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외모가 잘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눠 다르게 대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걸 본 적이 있을 거다. 그러나 자신의 외모를 소재로 삼는 것과 다른 사람의 외모를 소재로 삼는 건 다르다고 생각한다. 외모를 노골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른 차별적 대우 등을 재현하는 건 문제라고 본다.
블러디 퍼니의 향후 계획은
고은별: 코로나 때문에 (현재 활동이) 전무한 상태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코미디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저희가 기획한 ‘조크샵’ 프로그램이 있다. 3~4주 동안 진행하는데 스탠드업 코미디를 잘 몰라도 저희가 준비한 포맷으로 오픈마이크까지 함께할 수 있다. 조크샵을 활성화해 소수가 모여 개개인과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최정윤: 전 저 자신을 위해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했기 때문에 용기를 갖고 쭉 지치지 않고 해보고 싶다. 돈은 어차피 항상 마이너스다. 개인적인 목표는 내가 아주 재밌다고 생각한 조크를 모아 1시간 셋(set)을 해보는 것이다. 그걸 만들고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이어나가고 싶다.
최예나: 개인적으로 넷플릭스에 제 스페셜을 올리고 싶다. 근데 그때까지 일단 버텨야(웃음).
“오픈 마이크, 저도 참여할 수 있나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블러디 퍼니 멤버들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이들은 ‘웃기고 싶은 여자’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다며 인스타그램 계정을 구독해두라고 했다. 블러디 퍼니는 코로나19가 완화되면 다시 오픈마이크를 열 예정이다. 웃기고 싶은 여자들이여, ‘블러디 퍼니’에서 다음 마이크를 잡아보는 건 어떨까.
김승연 인턴기자
노유림 인턴기자
정인화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