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도도한 아카데미 벽 허문 ‘나이든 아시안 여배우’

입력 2021-04-26 10:59 수정 2021-04-27 01:03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영화 ‘기생충’의 4관왕 쾌거는 어쩌면 신호탄이었는지 모른다. 한때 ‘백인들의 잔치’라 불렸던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의 공고한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한국의 배우 윤여정(74)이 해냈다. 여성, 노인, 아시안, 그 모든 ‘차별’의 요소들을 짊어지고서.

영화 ‘미나리’에서 호연한 윤여정은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당당히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한국 배우가 이 시상식의 연기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기생충’이 기념비적 역사를 쓴 지난해에도 연기상은 후보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송강호의 남우조연상 노미네이트가 기대를 모았으나 불발됐다.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평소 매우 ‘쿨’한 어조로 자신을 “늙은 여배우”라 칭하는 이 백전노장의 성취는 그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을 고무시킨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동양인 여배우로서는 63년 만의 수상이다. 아카데미 역사상 보기 드문 광경이었던 셈”이라며 “고령의 동양인 여배우가 상을 타는 모습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꿈과 가능성을 품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아시아계 배우가 여우조연상을 받은 건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일본)에 이어 역대 두 번째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도도한 아카데미 시상식의 거대한 장벽이 무너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순제작비 200만 달러(약 22억원)밖에 안 되는 극저예산 영화에 출연해 직접 미국까지 가서 촬영한다는 건 엄청난 결단이었을 것”이라며 “(윤여정의) 영화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 이뤄낸 성취다. 가시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한 가치관과 태도가 훌륭하다고 본다”고 치켜세웠다.

영화 '미나리' 순자 역의 윤여정. 판씨네마 제공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지지 않는 연기 혼을 불살라 50년 연기 인생의 가장 큰 결실을 이뤄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기생충’이 이룬 쾌거의 바통을 ‘미나리’의 윤여정이 이어받은 셈이다. ‘기생충’이 한국영화의 높은 수준을 증명했다면 윤여정은 한국배우 개개인의 연기 질 또한 훌륭하다는 것을 세계 상업영화의 중심인 할리우드에서 증명해냈다”고 했다.

배우 윤여정. 후크엔터테인먼트 제공

국민일보가 2019년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연재한 [전찬일 강유정의 한국영화 100년의 얼굴]에서도 ‘한국영화를 빛낸 배우 25인’ 중 한 명으로 윤여정을 꼽은 바 있다. 당시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윤여정을 이렇게 평했다.

“20대엔 20대의 욕망, 40대엔 40대의 욕망, 그리고 60대가 되어선 60대의 욕망을 구체화하는 윤여정은 젊어서 가난했던 청춘과 너무 부유한 나머지 후안무치가 된 상류층도, 거리에서 여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형무소가 낫다는 극빈층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윤여정식으로 그려낸다. (중략)

그건 윤여정이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인간적 깊이 때문일 것이다. 결국 연기란 다양한 삶의 순간과 면모들을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 눈빛을 통해 분광하는 작업이다. 윤여정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한국영화사는 귀중한 인간학 하나를 완성하는 중이다.”

윤여정은 ‘오스카 레이스’ 기간 여러 외신 인터뷰에서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직설적이지만 적절한 유머를 곁들인 그의 화법은 늘 화제였다. 이날 시상식이 끝난 뒤 온라인 기자 간담회에서 ‘할리우드의 다양성 확대’ 등 다소 무거운 질문을 받았을 때도 그의 ‘돌직구’ 답변은 빛을 발했다. 그는 “심지어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있다. 여러 색깔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며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과 흑인, 황인종으로 나누거나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기자단과 만난 자리에서는 인종 문제에 대해 보다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그는 “아카데미 월(wall·벽)’이 ‘트럼프 월’ 보다 높아서 동양 사람에게 너무 높은 벽이 됐다”며 유색인종에게 폐쇄적이었던 아카데미의 고질적 문제를 꼬집었다. 그러나 평소의 쿨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지 않나”라며 “난 ‘최고’ 그런 말을 싫어한다. 최‘중(中)’만 돼도 되지 않나”라고 답했다.

아카데미에서 들려온 희소식은 코로나19로 시름하던 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윤 평론가는 “‘기생충’을 필두로 ‘살아있다’ ‘승리호’ 등 K무비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런 긍정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본다”며 “더불어 한국 배우들이 해외로 진출하고, 주목받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권남영 박은주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