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 피에르 가르뎅, 90세에도 패션쇼 연 비범한 거장

입력 2020-12-30 04:19 수정 2020-12-30 10:06
2014년 피에르 가르뎅 박물관에 선 피에르 가르뎅. AP연합뉴스

패션계의 전설, 기성복의 선구자로 불려온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이 98세를 일기로 29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이날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피에르 가르뎅이 이날 오전 일드프랑스 뇌이쉬르센의 병원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고 일간 르몽드, 프랑스앵포 방송 등이 전했다.

유족은 “피에르 가르뎅이 한평생 보여준 끈질긴 야망과 대담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는 세기를 넘나들며 프랑스와 세계에 독특한 예술적 유산을 남겼다”고 추모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인 중 하나로 꼽히는 피에르 가르뎅은 1922년 이탈리아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2살이던 해에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넘어왔다.

프랑스 생테티엔에서 14살에 처음 재단사로서 실과 바늘을 잡은 피에르 가르뎅은 1944년 패션의 도시 파리로 올라와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영화 촬영에 쓰이는 의상 등을 제작했다. 이때 장 콕토 감독의 영화 ‘미녀와 야수’(1946)에 사용할 의상을 만들었고, 콕토 감독의 소개로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알게 돼 1947년 디오르(Dior)의 첫 번째 재단사로 고용됐다.

1984년 모델에게 입힌 옷을 손보는 피에르 가르뎅. AP연합뉴스

1950년 자신의 브랜드를 내놓은 피에르 가르뎅은 1954년 엉덩이 부분을 둥그렇게 부풀린 모양의 ‘버블 드레스’를 선보이며 명성을 얻었고 1959년 디자이너 중 처음으로 프랭탕백화점에서 기성복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의 만든 의상들은 디자인 자체가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거나 기하학적인 문양을 품고 있어 미래지향적인 ‘우주시대룩’을 창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가 선호하는 옷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삶을 위해 내가 만든 옷”이라는 피에르 가르뎅의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그의 발언에서 옷을 대하는 철학을 엿볼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셔츠를 비롯해 향수, 선글라스, 물병 등 수백 가지 제품을 선보였던 그는 잘나갈 때 1000개가 넘는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79년 중국 베이징 자금성에서 처음으로 패션쇼를 선보인 최초의 서양인이 됐고 1991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패션쇼를 올린 최초의 디자이너로 기록됐다. 일찍이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일본에서도 브랜드 입지를 공고히 했다.

피에르 가르뎅은 2010년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마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를 커버하고 있고, 내가 선택하면 그곳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2006년 터키 패션쇼 무대에 오른 피에르 가르뎅. AFP연합뉴스

피에르 가르뎅은 2012년 7월 90세의 나이로 컴백 작품 발표회를 가지는 등 노년까지 활발히 활동하며 패션산업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이 걸린 상점은 10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컴백 작품 발표회에서 “나는 아직 내일을 위한 가솔린(에너지)을 갖고 있다”면서 “이 일을 시작할 때는 가장 어렸는데 이제는 가장 나이가 많아도 여전히 이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AFP는 “피에르 가르뎅이 미래를 내다본 창작뿐 아니라 유행을 주도한 의상을 대중에게 선보였다”고 평가했고, 로이터는 “초현대적인 디자인으로 1960, 70년대 패션 스타일을 뒤집어놓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피에르 가르뎅 밑에서 일하며 디자이너로 데뷔한 장 폴 고티에는 트위터에 “나에게 패션의 문을 열어주고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애도했고,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베네통을 이끄는 장샤를르 드카스텔바작은 피에르 가르뎅을 패션, 디자인, 건축에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 “아주 비범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