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주한미군 철수 문제 공개 거론
“한국 등 미군 배치에 대한 대통령 권한 침해”
미국 의회, 초당적 재의결…거부권 무효화 유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회를 통과한 2021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에 거부권을 23일(현지시간) 행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이 법안은 아프가니스탄과 독일,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대통령의 권한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면서 “이는 나쁜 정책일 뿐만 아니라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이 법안이 해외 주둔 미군의 철수·감축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을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트럼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무효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상·하원이 각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재의결하면 법안은 즉시 효력을 발휘한다. 미 의회가 거부권을 무효화할 경우 이는 트럼프 대통령 재임 4년 동안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
국방수권법은 국방 정책과 예산안을 담은 법안으로, 연례적으로 미국 의회에서 가결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효력을 발휘한다. 2021회계연도 국방수권법은 미군에 대한 3% 임금 인상을 포함해 7400억 달러(약 820조원)에 달하는 ‘슈퍼 예산’을 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국방수권법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경고해왔다. 이를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거부권을 행사한 뒤 하원의원들에 보낸 메시지에서 “유감스럽게도 이 법안은 중요한 국가 안보 조치를 포함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이 법안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헌법 2조 2항은 대통령은 육군과 해군의 ‘최고사령관(Commander in Chief)’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그는 “이에 따라 아프간·독일·한국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군대를 어디에 배치할지에 대한 결정 권한은 대통령에게 달려있다”면서 “의회가 이 권한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이 권한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국방수권법에는 주한미군 규모를 현재의 2만 8500명 미만으로 줄이는 데 예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독일 주둔 미군을 현재 수준인 3만 4500명 이하로 감축할 경우 국익에 부합하는지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감축 시에도 평가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해 감축을 어렵게 만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주독미군과 아프간 주둔 미군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거부권 행사 이전에 주독미군과 아프간 미군의 감축을 어렵게 만든 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이 법안을 반대하는 핵심 이유라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공개 석상에서 주한미군 철수·감축을 주장했던 적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번처럼 공개 문서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감축을 직설적으로 언급한 것은 사례를 찾기 힘들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을 딴 미군 기지와 군사시설의 명칭을 고치는 조항이 들어간 부분도 문제 삼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초당적으로 재의결에 나설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무효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 의회는 압도적 지지로 국방수권법을 통과시켰다. 하원은 지난 8일 ‘찬성 355 대(對) 반대 78’로 이 법안을 가결했다. 상원도 찬성 84, 반대 13으로 통과시켰다. 거부권을 무효화하기 위해선 상·하원의 재의결 투표에서 각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이 법안을 가결했을 때 이미 이보다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거부권 행사에 대해 “우리 군대에 해를 끼치고 안보를 위험하게 만들며 의회의 의지를 훼손하는 무모한 행동”이라며 오는 28일 재의결 추진 방침을 분명히 했다. 상원 군사위원장인 제임스 인호프 공화당 상원의원도 국방수권법이 59년 연속 통과된 점을 거론하면서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