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도 지킬 건 지켜야죠

입력 2020-12-16 05:00 수정 2020-12-16 05:00
tvN '철인왕후' 한 장면. tvN 제공

드라마·영화 등 상상력 및 허구에 기반을 둔 예술 작품일지라도 역사 왜곡 문제에서만큼은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강해지고 있다. 시청자는 예술적 허용도 역사적 사실 안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지적하는데, 최근 이런 흐름이 가속하고 있다. OTT를 타고 K드라마 열풍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역사가 창작의 영역 안에서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이 짙어지고 있어서다.

최근에는 쾌조의 스타트를 보였던 tvN 토일드라마 ‘철인왕후’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최근 막을 올린 ‘철인왕후’에 대한 시청자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다.

논란은 방송 전부터 시작됐다. 원작은 ‘태자비승직기’인데, 작가 선등은 혐한 성향이 짙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작 ‘화친공주’를 살펴보면, 한국과 한복을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조롱하는 태도가 묻어난다. 특히 한국인을 비하하는 ‘빵즈’라는 단어를 썼는데, ‘몽둥이로 때려야 하는 한국 놈들’ 정도로 순화할 수 있다.

방송 시작 후 논란은 불어났다. 한국 역사를 지나치게 왜곡·비하해서다. 2회에서 소용(신혜선)은 이런 말을 한다. “조선왕조실록 한낱 지라시네.” 시청자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한국의 국보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극 중 소용은 역사적 지식이 풍부한 인물인데, 그가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은 더욱 부적절하다고 꼬집었다. tvN은 비판이 이어지자 문제 된 대사를 다시보기 영상에서 삭제했다.

신정왕후 조씨 캐릭터도 논란을 빚었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지만 그를 미신에 심취한 캐릭터로 희화화했다는 지적이 확산했다. 후손인 풍양 조씨 종친회 역시 지나치게 모욕적이고 저속한 인물로 표현했다고 항의했다. tvN은 “부정적으로 표현할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대중의 지적에서 시작된 작품 속 역사 왜곡 문제는 이전부터 계속됐다. 팩션(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새로운 장르)의 경우 역사적 배경을 가져와 캐릭터와 서사를 창작하는데, 예술 작품이 어느 정도 허구를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역사 왜곡 문제에는 면죄부를 줄 수 없다는 반발이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이런 목소리가 거세졌는데, 그 이유는 OTT 대중화로 국내 시청자의 작품 감상 눈높이가 올라간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콘텐츠가 국내에서만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고 있어 외국인이 한국의 역사를 오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시청자가 공유하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도 이런 이유로 화살을 맞았다.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신미 스님의 무례함에 굴복하는 나약한 임금으로 그려졌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조현철 감독은 “고뇌와 상처, 번민을 딛고 백성을 위해 문자를 만들어 낸 그의 애민 정신을 극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tvN '미스터 션샤인' 한 장면. tvN 제공

tvN에서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도 근대사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해 집중포화를 맞았다. 주인공 구동매(유연석)가 몸담았던 조직 ‘겐요샤’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집단이다. 제작진은 단체명을 수정하는 것으로 일단락하려 했으나, 시청자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이름 탓이 아니었다.

핵심은 구동매가 조선에서 온갖 핍박을 견디다 친일파가 됐다는 설정 탓이었다. 친일파에게 피해자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곧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는 논리다. 이완익(김의성) 캐릭터도 도마에 올랐다. 그가 운요호 파견을 제안한 게 문제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했던 사건의 판을 조선인이 벌였다는 설정이어서다. 2017년 영화 ‘군함도’의 경우 조선인을 학대한 주동자가 조선인으로 그려지는데, 일제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한 드라마 작가는 “한국인은 자긍심이 강한 민족이라 가상의 시나리오라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며 “특히 일제 침략, 문화유산, 한글 창제 등 한국인의 긍지가 담긴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는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온라인을 기반으로 시청자의 적극적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은 환영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