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복서 임애지 “도쿄에서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 보여줄 것”

입력 2020-03-10 07:01 수정 2020-03-10 18:44
임애지가 지난 1월 진천선수촌 복싱장에서 훈련을 마친 뒤 국민일보와 인터뷰 중 화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진천=이동환 기자

지난 1월 진천선수촌 복싱장. 임애지(21·한국체대)가 수줍게 펴 보여준 노트엔 올해 이루고픈 목표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올림픽 나가기’ ‘국제시합 성적내기’ 같은 복싱 관련 목표부터 ‘학점 잘 받기’ ‘가계부 쓰기’ 같은 사적인 것들까지. 지난해 말 고심 끝에 하나하나 눌러 쓴 본인만의 ‘버킷리스트’였다.

“새해가 되면 통이 작아질까봐 연말에 미리 목표를 체크리스트처럼 적어놔요. 이루기 힘든 목표도 있지만 이제 시작이죠.” 기대감에 가득 찬 맑은 눈빛으로 설명하는 임애지의 모습은 20대 초반의 여느 대학생 같았다. 하지만 조곤조곤한 그의 말들엔 나이 어린 선수로만 치부할 수 없는 내면의 힘이 느껴졌다.

임애지가 지난해 말 작성한 '2020 버킷리스트'. 임애지는 9일 올림픽행을 확정지은 직후 '국제시합 성적내기', '올림픽 나가기' 란에 체크했다며 즐거워했다. 진천=이동환 기자

2020 도쿄올림픽 복싱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여자 페더급(57㎏급) 8강전이 열린 9일(한국시간) 요르단 암만의 링 위에서 임애지는 그런 굳건한 힘을 유감없이 분출했다. 인도의 사크시 사크시를 시종일관 강하게 몰아붙인 그는 5대 0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2020 도쿄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대표팀 유일의 대학생 선수인 그는 그렇게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올림픽 본선 진출이란 쾌거를 이뤘다.

임애지는 10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경기가 끝난 뒤 바로 버킷리스트에 체크를 했다”며 “목표를 적고, 실행하고, 결국 이뤄내 너무너무 기뻤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임애지는 유소년 시절 세계랭킹 1위까지 경험한 선수다. 2017 국제복싱협회(AIBA) 세계유스여자선수권대회에선 깜짝 우승을 차지하며 여자복싱에 국제대회 첫 금메달을 안기기도 했다. 하지만 성인 무대는 녹록치 않았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지난해 아시아 선수권과 체코 그랑프리까지 2년간 국제대회에서 메달권과는 동떨어진 성적을 냈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진 자신감에 가득 차 무서운 줄 몰랐다. 그런데 성인 무대에서 체격 조건이 더 좋은 선수들을 만나 자꾸 지니까 두렵기도 하고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상기했다.

임애지가 ‘훈련 모범생’이 된 건 그래서다. 경기가 안 풀린 날엔 많이 맞은 이유를 노트에 복기한 뒤 매일같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 대표팀 선배들의 멋진 플레이가 나올 때면 훈련 뒤 붙잡고 비법을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다. 김정주 대표팀 코치가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하는 선수”라며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다. 8강전 완승도 이런 치열한 훈련 덕에 가능했다.

임애지가 9일(한국시간)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복싱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여자 페더급(57㎏급) 8강전에서 인도의 사크시 사크시에 펀치를 날리고 있다. 유튜브 올림픽 채널 중계화면 캡처

임애지는 “대표팀 언니 오빠들의 조언대로 단타 공격을 하기보단 주먹을 한 번에 3~4번 이상 냈고 단점이었던 느린 스텝을 빠르게 한 게 적중했다”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충분히 훈련해와 ‘나보다 열심히 한 사람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복싱의 재미는 임애지가 계속해서 정진하는 비결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빴고, 여동생 임가을(19·한국체대)은 초등학교 때부터 스키선수로 합숙을 해 임애지는 외롭게 혼자 집에있는 날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접한 복싱은 그런 그에게 친구가 돼줬다.

“복싱은 누구랑 붙는지에 따라 매번 달라요. 저를 이긴 선수를 쉽게 잡은 선수를 만나도 제가 승리할 수 있는 게 복싱이죠. 정말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것 같아요.”

임애지가 9일(한국시간)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복싱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여자 페더급(57㎏급) 8강전에서 인도의 사크시 사크시에 5대 0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둔 뒤 미소짓고 있다. 유튜브 올림픽 채널 중계화면 캡처

임애지는 대회가 끝난 뒤 휴가를 받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학교로 돌아가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이후 10일 나란히 올림픽 티켓을 따낸 여자 라이트급 오연지(30·울산광역시청)와 함께 여자복싱 올림픽 첫 메달에 도전을 위한 담금질에 나선다.

임애지는 “꼭 메달을 딴다고 생각하기보다 열심히 훈련한 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후회 없이 보여주고 싶다”고 올림픽을 앞둔 각오를 밝혔다. 이어 “그 전에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힐링하고 싶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여동생과 올해부터 같은 학교를 다니게 돼 개강이 너무 기대된다”며 대학생다운 풋풋한 미소를 지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