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푹 꺼진 바닥의 금과 얼룩에서 산의 윤곽이, 꺼멓게 눌어붙은 껌딱지에서는 바위가 연상되는 식이다. 마치 조선 후기 문인화가 강세황이 담묵으로 산과 바위를 그린 ‘영통동구(靈通洞口)’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인사동을 우리말로 풀어쓴 ‘절골입구’라는 그림이다. 그는 터널 속 검댕이 만든 얼룩에서도, 하늘의 구름에서도 자연의 풍경을 본다. 콘크리트에 남은 거푸집 흔적이 기암괴석처럼 보여 탁본을 뜨기도 한다.
제작 기법은 이렇다. 목판에 금색을 수차례 펴 바르고 진한 청색 유채 물감을 그 위에 두껍게 칠한 뒤 철 핀 등으로 긁어냄으로써 바탕의 금색이 산수의 윤곽처럼 드러나게 한다. 긁어내는 과정은 일종의 상처내기로써 현대 문명이 가하는 폭력성을 은유한다.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상처를 어루만지는 묘한 힘이 있다.
조선 시대에 검은 종이에 금 가루를 아교에 갠 금물(금니)로 그린 ‘금니산수’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그의 작품 세계가 탄생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천대(옛 경원대) 회화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원래 20여년 개념미술을 했었다. “어느 순간 개념미술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가 끝나고 나면 작품은 모두 철거되고 설명서만 남는 게….”
돌파구를 찾고 싶은 2017년의 어느 날이었다. 활동 근거지인 대구 반지하 작업실에서 빈 벽을 보며 공허함을 삭히는 시간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날따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벽에 난 금을 보고 있자니 산수화가 떠올랐다. ‘청색 금니산수’의 시발인 ‘미장제색도’는 그렇게 해서 나왔다. 시멘트 칠을 하는 미장이의 ‘미장’과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제색(霽色·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색)’을 합쳤다.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즈음, 그는 회화 작가가 되어 제2의 작가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 부제는 ‘어느 반지하 생활자의 산수유람’이다. 1월 5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