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균열에서 상처난 풍경을 보다… ‘미장제색’전 배종헌 작가

입력 2019-12-26 16:32
배종헌(50) 작가는 길바닥이나 벽의 콘크리트 균열에서 풍경을 연상하고 그걸 전통 산수화처럼 그린다. ‘콘크리트 산수 작가’로 통하는 그가 서울 종로구 동숭길 아르코미술관에서 ‘미장제색(美粧霽色)’전을 하고 있다. 문화예술위원회 산하 아르코미술관이 중진 세대 작가들을 조명하고 신작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초대하는 중진 작가 2인 중 한 명에 뽑혔다. 최근 전시장에서 작가를 만났다. “우리 시대가 콘크리트 문명이 아닌가요. 그 문명의 폭력성이 가한 상처, 아픔이 제 작업에 숨어 있습니다.”
배종헌 작, '절골입구N1-01_콘크리트 균열과 생채기, 얼룩, 그리고 껌딱지로부터', 2019, 자작나무 합판에 유화, 70x120cm. 작가 제공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푹 꺼진 바닥의 금과 얼룩에서 산의 윤곽이, 꺼멓게 눌어붙은 껌딱지에서는 바위가 연상되는 식이다. 마치 조선 후기 문인화가 강세황이 담묵으로 산과 바위를 그린 ‘영통동구(靈通洞口)’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인사동을 우리말로 풀어쓴 ‘절골입구’라는 그림이다. 그는 터널 속 검댕이 만든 얼룩에서도, 하늘의 구름에서도 자연의 풍경을 본다. 콘크리트에 남은 거푸집 흔적이 기암괴석처럼 보여 탁본을 뜨기도 한다.

제작 기법은 이렇다. 목판에 금색을 수차례 펴 바르고 진한 청색 유채 물감을 그 위에 두껍게 칠한 뒤 철 핀 등으로 긁어냄으로써 바탕의 금색이 산수의 윤곽처럼 드러나게 한다. 긁어내는 과정은 일종의 상처내기로써 현대 문명이 가하는 폭력성을 은유한다.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상처를 어루만지는 묘한 힘이 있다.
배종헌 작가가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뒤로 보이는 작품은 고개를 비딱하게 하고 보면 산수화 같았던 벽의 균열을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게 회전하도록 설치됐다. 손영옥 전문기자

조선 시대에 검은 종이에 금 가루를 아교에 갠 금물(금니)로 그린 ‘금니산수’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그의 작품 세계가 탄생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천대(옛 경원대) 회화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원래 20여년 개념미술을 했었다. “어느 순간 개념미술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가 끝나고 나면 작품은 모두 철거되고 설명서만 남는 게….”

돌파구를 찾고 싶은 2017년의 어느 날이었다. 활동 근거지인 대구 반지하 작업실에서 빈 벽을 보며 공허함을 삭히는 시간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날따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벽에 난 금을 보고 있자니 산수화가 떠올랐다. ‘청색 금니산수’의 시발인 ‘미장제색도’는 그렇게 해서 나왔다. 시멘트 칠을 하는 미장이의 ‘미장’과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제색(霽色·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색)’을 합쳤다.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즈음, 그는 회화 작가가 되어 제2의 작가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 부제는 ‘어느 반지하 생활자의 산수유람’이다. 1월 5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