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사실을 고발한 뒤 일본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의 상징이 된 이토 시오리(伊藤詩織)가 18일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성폭행 피해를 입었음에도 냉대와 비난에 시달리던 그는 성폭행 피해 4년 8개월 만에 법정에서 승리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를 “사회 전체가 자신의 일이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처음으로 딸의 재판을 방청한 이토의 어머니는 “딸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락가락 가해자 진술… “신뢰성에 중대한 의문”
일본 도쿄지방재판소는 이날 이토가 성폭행을 당했다며 야마구치 노리유키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위자료 등 330만엔(약 33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가해자로 지목된 야마구치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일본 민영방송사 TBS의 전 간부다.
이토는 2017년 12월 야마구치를 상대로 1100만엔(약 1억1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 4월 야마구치와의 식사 자리에서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발하면서다.
기자지망생이던 이토는 취업상담을 위해 당시 TBS 워싱턴 지국장으로 잠깐 귀국했던 야마구치와 도쿄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이토는 저녁 자리에서 술을 마신 뒤 의식을 잃었고, 야마구치가 묵던 호텔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야마구치에 대해 ‘준강간’ 혐의로 체포영장까지 나왔지만, 검찰은 2016년 혐의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야마구치가 아베 총리와 가까운 것 때문이라는 추측까지 나왔다. 이에 이토는 2017년 기자회견을 열고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하며 성폭력 사실을 고발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성관계 합의 여부가 쟁점이었다. 스즈키 아키히로 재판장은 이날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이토는 합의 없이 성행위에 이르렀다”며 야마구치의 성폭행 사실을 인정했다. 재판장은 사건 당일 이토가 의료기관에서 들렀던 점, 사건 이후 며칠 사이 친구와 경찰에게 피해상담을 했던 점 등을 고려해 “성관계가 의사에 반한 것이었다”고 판단했다.
반면 야마구치에 대해서는 진술의 일관성이 없다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장은 “성관계 전후의 언행과 관련해 이후 이토에게 보낸 편지 내용과 법정에서의 진술이 모순된다”며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성행위에 합의가 아니라 이토 씨가 의식을 회복하고 거절 한 후에도 몸을 억누르고 계속했다”며 불법 행위를 인정했다.
야마구치가 이토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은 기각했다. 그는 합의된 성관계였고 자신의 명예와 프라이버시가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이토가 성범죄 피해자를 둘러싼 상황을 개선하려고 피해를 공표한 행위는 공공성과 공익성이 있다”며 “내용은 진실하다고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성폭력 문제는 사회 전체의 것
이토는 재판이 끝난 뒤 ‘승소’라는 펼침막을 들고 법원 밖으로 나왔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싶었다”며 2017년 고발을 회고했다. 이어 “제소 후에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늘었다”며 “자신의 진실을 믿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것을 고수하고 오늘 결과가 있었다”라고 당부했다.
또 “사회 전체가 자신의 일이라고 파악하면 좋겠다”며 사회적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형사사건은 불기소로 처리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게 됐지만, 민사소송으로 공적인 법정에서 증거를 내놓아 조금이라도 (사실이) 공개됐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똑같은 액션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지원을 해달라”고 말했다.
◇처음 온 법정, 맨뒷자리의 어머니
허프포스트재팬은 이날 이토의 부모님도 법정에서 방청을 했다고 전했다. 이토의 아버지는 지난 10월 방청을 했지만, 이날은 어머니가 처음으로 동석했다. 이토는 지난 2년간의 소송을 돌이키며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그는 “부모님이 법정에 보였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법정에 오셨는데 법정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다”라고 운을 뗐다. 그는 “시작할 때 2분의 영상촬영이 있었는데 그동안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용한 시간이 있고 눈앞에는 야마구치와 그의 변호인이 있었다”라며 “그를 보면서 ‘그는 어떤 생각으로 재판을 지내왔을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2년을 되돌아보는 2분이었다”라고 덧붙였다.
이토는 지금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 2년간 죽지 않아서 좋았다.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울먹였다.
이토의 어머니는 판결 후 “딸의 용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아사히신문의 시사주간잡지 AERA는 전했다. 그는 “걱정도 있었지만 잘 노력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며 “예전부터 정의감이 강한 아이였기 때문에 (피해를) 숨기고 살아가는 것은 딸답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야마구치를 향해서는 매섭게 질타했다. 이토의 어머니는 “당신에게 만약 딸이 있었으면 어땠을지 상상하길 바란다”며 “자신의 아이가 성폭력 피해를 당한다면, 부모라면 가슴이 찢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해자인 야마구치는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항소의 뜻을 밝혔다. 그는 “판결을 절대 납득할 수 없으므로 곧바로 항소한다”고 말했다. 야마구치는 이날 법원이 공공성과 공익성을 근거로 기각한, 이토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서도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