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홍콩 선거 참패’ 미국에 분풀이…캐리 람 ‘사퇴’ 압박

입력 2019-11-26 17:31
투표하는 홍콩 시민들.AP연합뉴스

중국 정부가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친중파가 궤멸하면서 위기에 몰리자 사태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며 분풀이를 하고 나섰다.

미국에서 추진중인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홍콩 인권법안)을 문제삼아 주중 미국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관영 매체도 미국 때리기를 이어갔다. 홍콩에서는 선거 참패의 ‘진앙’인 캐리 람 행정장관에 대한 사퇴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26일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정쩌광 외교부 부부장은 전날 테리 브랜스태드 주중 미국대사를 불러 미국 상원과 하원에서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홍콩인권법안)이 통과된 것을 강력히 항의하며 홍콩 문제와 중국 내정 간섭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정 부부장은 “홍콩은 중국의 홍콩이고 홍콩 문제는 중국 내정에 속해 어떤 국가도 간섭할 권리가 없다”며 “홍콩을 어지럽히고 번영과 안정을 해치려는 어떤 시도도 실현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측이 잘못을 시정하고 관련 법안을 중지하고, 홍콩 문제 및 중국 내정 간섭에 대한 발언을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경고했다. 앞서 마자오쉬 외교부 부부장도 지난 20일 홍콩인권법안과 관련해 임시 대사 대리인 윌리엄 클라인 주중 미국대사관 공사 참사관을 초치한 바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논평에서 홍콩 선거에 대해 폭력 분자와 외부세력이 선거를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인민일보는 “이번 선거는 홍콩 ‘풍파’ 중에 치러진 선거로 폭력 분자와 외부 세력이 협공으로 폭력 수위를 높이고, 홍콩 사회에 대립을 조장했다”며 “이들 세력은 수개월에 걸쳐 사회를 혼란하게 해 선거 과정을 엄중히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인민일보는 또 다른 논평에서 “홍콩 인권법안은 폭력 범죄를 조장하고 중국 내정을 함부로 간섭하는 법안”이라며 “이미 미국의 반중 세력과 홍콩 극단주의 폭력 세력이 연결돼 있다는 많은 사실이 증명됐다”고 주장했다.

범 민주 진영이 구의원 의석을 거의 싹쓸이한 홍콩에서는 캐리 람 행정장관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구의회 선거에서 91명의 당선자를 낸 민주당의 우치와이 대표는 “람 장관이 사임, 내각 개편, 독립적인 조사위 발족 등 당장 가능한 일들이 있다”며 사실상 람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우 대표는 정부가 계속 시위대의 핵심 요구를 외면하면 다시 대립이 격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친중파 진영에서도 이 대로 가면 내년 입법회 의원 선거 등에서도 살아남기 힘들다고 우려하며 람 장관과 거리두기를 하는 분위기다.

친중파인 신민당의 레지나 입 대표는 더 이상 정부의 편을 드는 ‘고무도장’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신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후보 28명이 모두 낙선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거대한 패배를 떠안은 친중파 진영은 베이징에 람 장관 축출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 중앙정부는 람 장관을 지지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범 민주 진영이 압승을 거두면서 홍콩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1200명의 선거인단 중 40% 가까이를 확보하게 돼 홍콩 정치에 큰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행정장관 선거인단 1200명은 금융, 유통, IT, 교육, 의료 등 38개에 이르는 직능별로 16∼60명씩 뽑는 직능별 선거인단과 입법회 대표 70명,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60명, 종교계 대표 60명 등으로 이뤄진다.

2016년 말 선출된 약 1200명의 선거인단 중 범민주 진영 인사는 325명을 차지했으나 이번 선거 승리로 구의원 몫의 117명 선거인단을 추가로 확보하면 선거인단의 37%인 총 442명에 달한다.

게다가 현재의 반정부 분위기를 감안하면 2021년 선거인단 선출에서 과반을 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선거인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재계가 기존 친중국 성향에서 일부 돌아선다면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라는 분석이다.

홍콩 매체들은 “범민주 진영이 조왕(造王·킹메이커)이 됐다”고 보도했다. 동방일보는 “범민주 진영이 재계와 협력한다면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할 수도 있다”며 “이는 중국 중앙정부에 중대한 경고 신호”라고 보도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