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평화는 죽었다.” 법원의 판결 선고에 분노한 시민들의 구호가 쏟아졌다. 흑인 이웃 보탐 진(사망 당시 26세)을 총격 살해한 백인 여성 경찰관 앰버 가이거(31)에게 예상보다 낮은 징역 10년의 형량이 선고된 탓이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원성 속에 곧바로 이어진 희생자 동생의 말과 행동은 법정의 소란을 잠재우고 기어코 미국 사회를 울렸다.
재판이 열린 텍사스주 댈러스카운티 연방지방법원에는 2일(현지시간) 미국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카리브해 섬나라 세인트루시아 출신의 흑인으로 컨설팅 회사에 다니며 촉망받던 젊은 회계사가 백인 경관의 총에 맞아 숨진 이 사건의 판결에 미 전역이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황망한 죽음이었다. 지난해 9월 야간 근무를 마치고 자신의 아파트로 귀가하던 가이거는 집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으로 조심히 들어간 그는 그곳에 있던 보탐을 총으로 쐈다. 자신의 집은 3층이었는데 남자친구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4층에 잘못 내린 뒤 보탐의 집을 자기 집으로 착각하고 저지른 끔찍한 실수였다. 가이거는 “강도인 줄 알았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휴대전화에서 인종차별적 내용의 문자 메시지들이 다수 발견되며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사건 당시 보탐이 자기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TV를 시청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도대체 흑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있느냐’는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뿌리 깊은 질문도 제기됐다.
검찰이 징역 28년을 구형한데다 전날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유죄 평결을 내리며 사실상 무기징역인 최대 99년형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이날 법정에 모인 시민들이 보인 실망감과 분노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야유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증인석에 앉아 있던 한 흑인 소년이 입을 뗐다. 보탐의 동생 브랜트 진(18)이었다.
브랜트는 눈물 머금은 눈으로 형의 원수를 바라보며 “저는 당신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랑합니다. 제 형처럼 당신이 죽고 썩어 사라지길 원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에 있는 제 가족들에게는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일이지만 저는 당신이 감옥에 가는 일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만 빌어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형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라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남은 삶은 그리스도에게 헌신해달라고 당부했다.
브랜트가 내민 용서의 손길은 기적으로 이어졌다. 브랜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게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그를 한 번 안아줄 수 있을까요?”라고 판사에게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허락했다. 울고 있던 가이거는 앞으로 걸어나와 브랜트를 향해 팔을 벌렸다. 두 사람은 증인석 앞에서 한참을 포옹하며 대화를 주고 받았고, 가이거의 흐느낌이 법정을 가득 채웠다. 시민들이 흐느끼고 오열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판사마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10대 소년이 보여준 심원한 깊이의 용서에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에릭 존슨 댈러스 시장은 성명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보탐과 브랜트 형제, 그들 가족이 보여준 사랑과 믿음, 믿을 수 없는 용기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 크루조 댈러스카운티 지방검찰청장도 “오늘날 사회에서, 특히 우리의 지도자들에게서 보기 드문 ‘사랑과 치유’의 놀라운 기적”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