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은 여러 통로를 통해 청나라 해상화파 그림을 접했겠지만, 40세 무렵 드나들기 시작한 역관 오경연의 집에서 중국의 유명한 고금 서화를 많이 보고 또 중국 화보를 임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임모臨模는 동양화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화가 수업의 하나로 유명한 서화를 옆에 두고 그대로 옮겨 그리는 방식을 말한다. 장승업은 《시중화詩中畵》, 《고금명인화고古今名人畵穚》, 《인재화승紉齋畵賸》 등의 중국 화보畫譜를 임모하기도 했다. 개항 이후에는 상하이에서 막 간행된 수입 화보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해상화파 화풍을 적극 수용했던 것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그는 1885년에 간행된 청나라 마도馬濤의 《시중화》를 임모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해갔는데,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 〈삼인문연도三人問年圖〉 〈고사세동高士洗桐〉 등에서는 《시중화》의 화본 도상이 복장이나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수염을 없애는 식으로 약간의 변형을 가하면서 그대로 보인다.〈풍림산수도〉 등 산수화에서도 1888년 출간된 《고금명인화보》 속 〈산수도〉의 흔적이 보인다.
영모화, 화조화, 기명절지화에서도 해상화파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최경현의 논문 ‘19세기 후반 수입된 중국 시전지와 개화기 조선화단’에 따르면 장승업의 《산수영모도》10폭 병풍 중〈계도鷄圖〉는 맨드라미가 핀 수석 아래 수탉이 있는 그림인데, 닭의 벼슬처럼 생겨 계관화라고도 부르는 맨드라미를 그려 넣음으로써 높은 관직에 오르고 싶은 장삼이사의 욕망을 반영한다. 이 닭 그림은 해상화파 장웅張熊(1803~1886)의 〈추방도秋芳圖〉(1882)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 북경 성흥호에서 제작한 시전지에 비슷한 도상이 있어 영향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장승업은 시중의 취향에 관심을 가졌던 상업적인 화가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술을 아주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져 왕실과 대갓집의 산해진미를 마다하고 트레머리 주모가 따라주는 막걸리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하지만, 그가 순수한 예술적 열정만을 가지고 있을 뿐 돈벌이에는 무심한 기벽의 소유자라는 취선醉仙의 이미지는 영화가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다.
실제로 당시 장승업의 활동무대는 서울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그림을 전국의 부자들이 갖고자 했던 것이다. 예컨대, 경상남도 구포龜浦(현 부산 일부)에 사는 지주의 초청을 받아 3개월간 대접을 받으며 주문 그림을 소화한 적이 있고, 충남 공주에 거주하던 유복열의 부친인 유병각劉秉珏에게 그려준 작품도 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새롭게 발흥했던 지주층 등이 이런 해상화파식의 장식적인 그림을 구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장승업의 작품에는 제자인 안중식의 대필代筆 관서款署가 많은데, 장승업에게 쏟아진 그림 주문이 그만큼 많았음을 뜻한다.
# 제자 안중식 조석진에게도 전해진 상하이 화풍
장승업의 화풍은 제자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晋(1853~1920) 등에게도 계승되었던 만큼 감각적이면서 통속적인 주제의 해상화파 화풍의 수용은 개항에 따른 수요자들의 미감의 변화를 화가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그림에 대한 관심은 개항기 화가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태도였다.
앞에서 언급한 지주층 뿐 아니라 고위 관료, 의사 같은 중인 전문직, 종교인까지도 이들의 그림을 갖고 싶어 했다. 1912년 조석진은 안중식과 함께 역관 출신으로 당시 고위 관료로 재직 중이던 현은玄檃(1860~1934)의 주문을 받아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를 그리기도 했다. 현재 한양대박물관 소장으로 중국 신선에 관한 여러 사람의 고사에 관한 내용이다. 개화기에서 식민지시기에 걸쳐 의사로 활동했던 유병필 역시 조석진의 어해도와 도석인물화를 즐겨 구입했다. 종교인으로는 천도교주 김연국金演局(1857~1944)이 안중식, 조석진, 그리고 두 사람의 제자인 김은호金殷鎬(1892~1979) 등으로부터 영모화나 화조화를 구매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해상화파의 수용은 주로 화보를 임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조석진은 〈동방삭투도〉 〈신선〉과 같은 유형의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런 그림은 장수를 기원하는 잔치의 선물용으로 선호되었다. 이런 중국 화보의 활용은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1868~1933)에게서도 나타나는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확인이 되지 않고 있지만 당시 상류층을 상대로 그림 주문에 응했던 당대 화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화보를 통해 그림을 익히는 방식은 독창성보다는 숙련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스승과 제자의 그림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스승이 바쁘면 제자가 대신 그리는 대필의 관행도 그래서 가능할 수 있었다.
“경향 각지에서 소림(조석진) 선생에게 들어오는 그림 주문에는 문하생들도 일조했다”고 김은호는 회고록 《서화백년》에서 전한다. 조석진에게 들어오는 그림 주문 가운데 산수화는 노수현盧壽鉉(1899~1978)이, 기명절지화는 변관식 卞寬植(1899~1976)이 주로 그렸다는 것이다. 스승인 조석진은 제자들에게 ‘이건 네가 좀 그려보라’고 그림을 맡겨놓고 훌쩍 일어서서 친구처럼 지내던 안중식의 화숙 경묵당耕墨堂으로 놀러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그림 주문이 밀려 바쁘면 제자에게 대필시키기는 안중식도 마찬가지였다.
안중식의 자신의 집에서 문하생을 길러냈던 사숙, 즉 사설 아카데미 격인 경묵당의 활동을 책으로 엮은 《근대 서화의 요람, 경묵당》을 보면 중국에서 건너온 화본이나 스승의 그림 체본을 제자들이 그대로 임모하면서 배우는 도제식 교습 방식 탓에 ‘판박이 그림’을 찍어내듯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장수했다고 전해지는 중국 고사 속 인물 동방삭을 그린 이상범의 〈동방삭투도도東方朔偸桃圖〉 습작은 스승 안중식의 같은 그림을 옷자락 방향 하나 틀리지 않고 빼다 박다시피 그렸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김규진과 함께 개항기~일제강점 초기 3대 화가로 불렸던 스타 미술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중국을 직접 방문한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1881년 청나라 무기제조국에 파견되는 정부 유학생으로 중국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후 안중식은 1891, 1899년 개인적으로 상하이 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힌다. 구한말 대구 출신의 서화가인 서병오徐丙五(1862~1935)는 1898년 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권유로 중국 유학길에 올라 1905년 귀국까지 8년간 베이징, 상하이, 소주, 남경 등지를 주유하며 포화, 민영익, 서신주, 오창석 등을 만나게 된다. 이어 1909년 2차 상하이 여행 때 다시 포화를 만나는 등 지속적으로 교유한다.
이렇게 직간접으로 견문을 넓이면서 화가들은 그저 화풍만 수용한 것이 아니라 제작 기법도 수용했다.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를 이용함으로써 과거에 비해 훨씬 체계적으로 미술 교육과 제작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화보를 이용하는 방식은 그림 제작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에 직업화가로서의 혁신으로 볼 수 있다.
상하이 지역에서 간행된 《점석재총보點石齋總譜》, 《해상명인화고海上名人畵稿》, 《고금명인화보古今名人畵譜》 같은 총보류總譜類와 개인 화보류인 《사산춘화보沙山春畵譜》 《시중화詩中畵》 등의 화보가 유입되어 화가들의 도제식 수업에 사용되었음은 고희동‧김은호의 언론 인터뷰, 자서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중 《시중화》는 해상화파 화가 마도의 작품을 수록한 화보로, 장승업에서부터 임모되기 시작해 근대기의 안중식, 조석진, 지운영池雲英(1852~1935) 등 많은 화가들이 임모하는 등 개화기 화단의 화풍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그림을 그려라...부귀영화 통속적 주제 인기
안중식이 자신의 집에서 문하생을 길러냈던 사숙, 즉 사설 아카데미 격인 경묵당에서도 상하이에서 건너온 화보를 임모하는 방식이 수업에 적극 활용되었다. 이를 증거하는 것으로, 《해상명인화고》를 참고하여 그린 〈연거귀원도蓮炬歸院圖〉 습작, 《시중화》를 참고한 〈무송반환도〉 등이 전해진다. 이 가운데 《해상명인화고》는 양백윤, 임훈, 전혜안, 장웅, 호원 등 상해 지역에서 활동한 여러 화가들의 화본을 엮어서 1885년 상하이에서 간행한 그룹 화보집이다.
부귀영화에 대한 욕망은 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민층에서도 길상적인 내용의 민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것이다. 길상의 의미가 들어간 그림들은 대부분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자식을 많이 낳고, 오래 살기를 소망하면서 동시에 악귀는 쫓아내는 모티프를 형상화한 그림들이다. 누구나 평생 한 번 가고 싶었던 금강산을 그린 산수화, 오래 사는 신령스런 동물인 거북 그림, 충과 효 등의 글씨와 그림을 병치한 문자도, 과거에 급제해 대궐에 들어가 벼슬살이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은 궐어도,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도, 부능하고 부패한 관리에 대한 비판을 담은 까치호랑이 그림…….
통속적인 주제의 이런 그림들이 유행하는 데는 구한말의 격변기 신분질서의 동요가 바탕에 깔려있는 것 같다. 신분제가 공고해 자신이 평생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하다면 부자가 되고 벼슬을 한다는 소망조차 품기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양반 호적을 돈으로 거래하고, 중인도 부자가 될 수 있고, 벼슬까지 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고아한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할 게 아니다. 누구라도 부귀영화를 꿈꾸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며 양반 감투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욕망이 지배한 사회에서는 그림도 그런 욕망을 담아내기를 원한다. 유명 서화가가 아닌 시정의 삼류 화가가 그린 민화에도 그런 욕망이 담겼다. 민화 수요에 대해서는 지전 등에 고용된, 기량이 낮은 ‘기술적 화가’들이 기성품을 제작하여 공급했다. 장승업도 유명해지기 전에는 지전에 고용돼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민화를 그린 화가로는 도화서가 폐지되기 직전에 도화서 시험에 낙방한 화가들, 화원을 꿈꾸며 생도로 도화서에 들어갔지만 끝내 생도에 머문 화가들, 약간의 기술적인 지도를 받아 그림의 기량을 쌓은 화가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모방하면서 화법을 익힌 화가들이 있을 수 있다.
민화 역시 다량 생산을 위해 ‘본그림’이 활용되었다. 민화의 유통에는 민화 화가들의 제작상의 혁신보다는 시중 수요의 확산을 느끼고, 이들을 고용해 그림까지도 판매한 지전이나 후술할 서화포의 주인 등 중개상들의 역할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