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훈풍, 결과로 이어지나… 美 ‘볼턴·리비아모델 아웃’ 北 ‘협상 낙관’

입력 2019-09-21 07:0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 30일 오후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꽁꽁 얼어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북·미의 ‘북한 비핵화 협상’에 최근 들어 훈풍이 불고 있다. 미사일 도발을 해오던 북한이 멈춰있던 미국과의 실무협상을 제안했고, 미국은 대북 강경파인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을 경질하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볼턴 전 보좌관이 줄곧 주장한 ‘리비아모델’을 비판했고, 북한은 이를 평가하면서 “협상을 낙관한다”고 화답했다. 한동안 막혔던 북·미 간 북핵 비핵화 협상에 부는 훈풍이 실질적 결과로 나타날지 주목된다.

◇미사일 쏘던 北의 ‘실무협상 제안’ 선회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이후 미국과의 대화 재개를 거부해온 북한이 지난 9일 실무협상 재개 의사를 전격 발표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이날 밤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문에서 “우리는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국 측과 마주 앉아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온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역사적인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며 올해 말까지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했다”며 “나는 그사이 미국이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계산법을 찾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리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4시간 만에 백악관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 선거유세장으로 떠나기 전 기자들과 만나 “북한과 관련해 방금 나온 (북한의) 성명을 봤다”면서 “그것은 흥미로울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어 “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아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서 “그들(북한)은 (우리를) 만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침묵하고 있던 북한이 대화 재개 의향을 밝힌 데는 북한이 가장 중시하는 체제보장, 비핵화의 대가로 언급해 온 북한 경제발전 등 상당한 물밑 조율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인내과 압박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 북한은 수차례 단거리 미사일 등을 발사하면서 도발을 감행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기쁘지는 않다면서도 북한이 어떤 합의도 위반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강경 대응을 자제했다. 또 최근에는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북·미 비핵화 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핵무장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초강수를 두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볼턴 아웃

‘슈퍼 매파’라고 불리며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서 줄곧 강경한 태도를 유지해온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질도 비핵화 협상의 방향 전환을 암시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일 트위터를 통해 볼턴 전 보좌관을 전격 경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어젯밤 존 볼턴에게 그의 복무가 더이상 백악관에서 필요하지 않다고 알렸다”며 “나는 그에게 사직을 요구했고 사직서는 오늘 아침 내게 전달됐다”고 밝혔다. 대외정책에서 불화를 빚어온 볼턴을 경질하면서 북·미 대화에 미칠 영향도 주목을 받았다.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북한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를 통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을 지목해 “불안정 요소가 (아직) 남아 있다”고는 했지만 볼턴 전 보좌관의 경질에 대해 “잘된 일”이라고 반응을 내놨다.

볼턴 전 보좌관은 ‘선 비핵화, 후 보상’이라는 리비아 모델을 강조하면서 강경모드를 유지했다. 그는 지난 4월에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리비아는 “북한과 차이가 있다”면서도 “우리는 2003~2004년 리비아 모델에 대해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먼저 핵무기 등 핵 관련 시설과 물질을 완전히 포기하는 ‘빅딜’이 진정한 비핵화의 방식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볼턴 전 보좌관의 당시 ‘리비아 모델’ 언급은 북·미 정상회담을 좌초시키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전해졌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 발언에 격노해 그를 북한 문제에서 배제한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실제 볼턴 전 보좌관은 지난 6월30일 북·미의 판문점 회동 당시 몽골에 출장을 가 ‘볼턴 패싱’ 논란이 일었다. 미리 예정된 일정이긴 했지만, 미국 외교·안보 정책을 관장해 대통령에게 전하는 핵심 자리인 국가안보보좌관이 미국이 공들이는 북한 비핵화 관련 회동에 빠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볼턴 보좌관의 악연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그는 2003년 북핵 6자회담 당시에도 북한을 비난했다가 미국 대표단에서 제외된 적이 있다. 당시 조지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이던 그는 서울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폭군적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북한 주민들이 그 치하에서 시달린다는 내용의 강연을 해 북한으로부터 “인간 쓰레기, 피에 주린 흡혈귀”라는 비난을 들었다.

◇리비아모델 아웃과 북한의 “협의 낙관” 환영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실무협상 재개를 앞두고 볼턴 보좌관의 ‘리비아모델’은 비판하고 북한이 언급한 ‘새로운 방법론’을 꺼내 들며 북한에 화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 경질 다음 날인 11일 그의 리비아 모델 언급이 ‘큰 잘못’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지난 18일에도 자신의 대북 정책이 실패할 것이라는 볼턴 전 보좌관의 비난에 대응하며 “리비아모델 언급히 북·미 간 대화 국면에 큰 차질을 초래했다”고 공격하며 “어쩌면 새로운 방법이 매우 좋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다만 새로운 방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새로운 방법’ 언급을 환영하며 실무협상을 “낙관한다”고 말했다.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20일 자신이 향후 진행될 북·미 실무협상 수석대표라고 밝히며 발표한 담화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리비아식 핵포기’ 방식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조·미(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주장하였다는 보도를 흥미롭게 읽어보았다”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존 볼턴의 후임으로 임명된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사진=AP연합뉴스

김 대사는 “조·미실무협상 우리 측 수석대표로서 나는 시대적으로 낡아빠진 틀에 매여 달려 모든 것을 대하던 거추장스러운 말썽꾼이 미 행정부 내에서 사라진 것만큼 이제는 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조·미관계에 접근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현명한 정치적 결단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말썽꾼은 리비아모델을 주장해온 볼턴 전 보좌관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어 “새로운 방법에 어떤 의미가 함축돼 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조·미 쌍방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으며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단계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취지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측이 이제 진행되게 될 조미협상에 제대로 된 계산법을 가지고 나오리라고 기대하며 그 결과에 대하여 낙관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