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강행을 위해 꺼내든 조기총선안이 의회에서 또 한 번 가로막혔다. ‘노딜 브렉시트’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시한까지 유럽연합(EU)을 무조건 탈퇴하겠다는 그의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존슨 총리가 불법을 무릅쓰고서라도 브렉시트를 강행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영국 하원은 9일(현지시간) 존슨 총리가 상정한 조기총선 동의안을 찬성 293표, 반대 46표로 부결시켰다고 BBC방송, 가디언 등은 보도했다. 조기총선이 열리려면 하원 전체 의석 650석에 중 3분의 2인 434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10월 31일까지 ‘무조건 브렉시트’를 외쳐온 존슨 총리는 하원이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안을 통과시키자, 조기총선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해당 법이 10월19일까지 정부가 EU와 새 합의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내년 1월31일까지 브렉시트 시한을 연기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원은 지난 4일 첫 표결과 이날 재표결에서도 존슨 총리를 가로막았다.
존슨 총리는 조기총선안 부결 후 “나는 하원에 국민을 믿으라고 촉구했지만 야당은 자신들이 (국민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만 보여줬다”며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하고 영국 국민들이 선거로 말했던 것을 두 번이나 부인했다”라고 야당을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브렉시트 강행 의지를 재차 내비쳤다. 그는 “의회가 내 두 손을 묶어놓더라도 나는 국가 이익을 위한 합의를 얻으려 노력할 것”이라며 “이 정부는 브렉시트를 더 이상 연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국 하원은 추가 압박수단으로 ‘의회정회’와 노딜 브렉시트 시 발생할 문제들은 여론에 환기하기 위해 정부의 ‘노랑멧새 작전’ 보고서와 관련한 의사소통 내용 일체를 공개토록 하는 의안을 찬성 311표, 반대 302표로 가결시켰다. 해당 문서는 노딜 브렉시트가 강행될 경우 식품·의약품 부족 등 대규모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원의 제동에도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목소리도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존슨 총리가 브렉시트 연기를 막기 위해 일종의 ‘사보타주’(의도적인 파괴 또는 태업)를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법에 따라 EU에 형식적인 기한 연장을 요청할 뿐, 실제로는 EU가 영국의 요청을 거부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EU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는 브렉시트의 추가 연기를 용인할 수 없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내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존슨 총리가 제안한 백스톱(안전장치) 폐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협상은 옵션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은 바 있다. 프랑스 대통령실 관계자도 프랑스가 노딜 브렉시트를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라고 보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영국 내 브렉시트 강경파들은 브렉시트 연기가 EU 27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를 요하는 사안인 점을 이용해 개별 회원국을 공략한다는 구상도 검토 중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존슨 총리가 유럽연합법 위반해 ‘노딜 브렉시트’를 강행하는 방안을 택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보수당 대표를 지낸 브렉시트 강경파 이언 덩컨 스미스 의원은 존슨 총리가 법을 어겨 감옥에 수감된다면 “브렉시트 순교자”로 남을 것이라며 불복종을 부추겼다.
의회는 브렉시트 예정일을 7주 남기고 10월 14일까지 정회에 들어갔다. 앞서 존슨 총리는 다음달 3일 예정된 의회 회기 개시를 5주 동안 연기했다. 여러 국내 정책을 담은 입법안 추진을 위해서라는 이유였지만, 외부에선 의회의 브렉시트 논의를 원천봉쇄한 것으로 보고 ‘민주주의 파괴’라는 반발이 나왔고, 하원의 노딜 방지법안 추진으로까지 이어졌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