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정권 내부에서 미국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제재 국면이 장기화되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란 지도부는 미국이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등 포괄적 보장 조치를 해준다면 더욱 전향적인 양보를 내줄 수 있다는 의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란 정권 핵심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상이 궁극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29일(현지시간)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란 지도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에 재선할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 경우 앞으로 6년 동안 혹독한 대(對)이란 제재를 감내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란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40년 동안 미국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체제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을 탈퇴한 이후에는 서로 상대편 무인기를 격추하는 등 군사 충돌까지 벌였다. 이런 점에서 이란 지도부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상을 거론하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전환이라고 NYT는 평가했다.
이란은 이미 대화를 바란다는 신호를 보낸 바 있다. 모하메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지난 25일 프랑스 비아레츠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장에 깜짝 등장했다. 자리프 장관은 미국 측 당국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화에 응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특정 개인’이라고 지칭하며 “이란의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만남을 마다하지 않겠다”며 미·이란 정상회담 가능성까지 내비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이란 간 대화가 이뤄질지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이 보다 우세했다. 온건파에 속하는 로하니 대통령과 자리프 장관이 아야톨라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와 군부 등 보수파의 압력 때문에 미국과의 대화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로하니 대통령은 미·이란 정상회담 의향을 밝힌 지 하루 만에 “미국이 먼저 부당한 불법 제재를 해제하지 않는다면 미국과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 발짝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이란 내 강경 보수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간지 ‘케이한’은 로하니 대통령과 자리프 장관 등 미국과의 대화를 언급한 당국자들을 겨냥해 “제정신이냐”고 힐난하는 논조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하지만 이란의 이런 태도는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새로운 협상 전략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한다고 내부 소식통들은 귀띔했다. 이들은 이란 지도부가 화전 양면전술을 구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군사적 위협과 핵개발로 도발하는 동시에 물밑으로는 대화 신호를 보냄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가 본능’을 자극하겠다는 것이다.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유권자들에게 과시할 만한 외교 업적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실제로 에샤크 자한기리 이란 제1부통령은 이달 초 대미 대응 전략을 주제로 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회의 참석자에 따르면 장기적 경제제재 해제가 포함된 포괄적 보장 조치를 미국이 약속할 경우, 이란 측은 탄도미사일 개발 제한과 중동 지역 내 이란의 전략적 위상 조정 등 미국이 바라던 의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 의향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