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상주본이 국가에 반환되는 그날까지...”

입력 2019-08-14 10:06
상주고 김동윤 군이 13일 교실을 순회하며 훈민정음 상주본 반환을 위한 서명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김동윤 학생 제공

“훈민정음 상주본이 국가에 반환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훈민정음 상주본 반환 서명운동이 경북 상주지역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돼 눈길을 끈다.

상주고교(교장 정창배) 김동윤(17·2학년)군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이 서명운동은 지난 12일부터 13일까지 전교생 416명을 대상으로 진행돼 380명의 서명을 받았다.

앞으로 상주지역 다른 고교는 물론 나아가 SNS 등을 통해 전국 고등학교로 확산시킨다는 계획이다.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와 문화재청의 소유권 공방이 11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상주본 공개와 관련해 서명운동이 추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군은 “훈민정음 상주본 공개 문제가 어른들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 학생들도 목소리를 내겠다”며 “서명 캠페인을 전국으로 확산시켜 청와대의 적극적인 관심과 개입을 이끌어내는 등 상주본이 국가에 반환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김 군은 “최근 부모님과 함께 영화 ‘나랏말싸미’를 관람한 뒤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위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서명운동을 착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교내 서명운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김 군은 이어 상주지역 전체 고교생들로부터 서명을 받은 뒤 SNS 등을 통해 전국 고교생들의 서명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취지와 목적이 좋아 보인다”며 “학생들이 주도하는 이 운동에 혹여 학교 측이 관여하고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는 입장이다.

상주고 학생들은 상주본 반환 서명운동과 함께 ‘대한민국의 저력은 한글에서 나온다’는 한글만세운동도 함께 벌이고 있다.

여기에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상주본의 관리주체가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도 이날 등장했다.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나도 직접 보고 싶어요”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대한민국의 힘과 저력은 한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며 “한글 창제의 원리가 정리된 국보급 문화재 훈민정음 상주본을 개인이 소장한 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상주본의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는 대법원 판결도 난 만큼 문화재청은 보다 적극적으로 상주본 반환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주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상주본 반환을 위한 서명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며 “17세 학생들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에 어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껴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글을 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상주고 김동윤 군이 13일 오후 교실을 순회하며 훈민정음 상주본 반환을 위한 서명운동을 받고 있다. 김동윤 학생 제공

한글 창제의 배경과 원리 및 사용법을 기록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것이 유일본이었지만 2008년 경북 상주의 고서적 수집가 배익기 씨가 다른 해례본을 공개하면서 해례본은 2개가 됐다.

배씨가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상주본이며 이 상주본은 세상에 빛을 본 지 1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여정은 파란만장하다.

배씨는 골동품상 조모 씨와 상주본을 놓고 소유권 분쟁을 벌였다.
조씨는 자신의 골동품 점에서 배씨가 훔쳐 간 것이라고 주장했고 소송 끝에 법원은 원 소유자는 조씨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조씨는 얼마 뒤 상주본의 소유권을 문화재청에 이양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이후 문화재청은 배씨에게 상주본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배씨는 되레 국가의 강제 집행을 막아달라고 소송을 냈다.

이후 법원은 지난달 상주본의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고 확정 판결을 내렸다.
문화재청이 배씨에게서 상주본을 강제 회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었지만 상주본의 행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강제집행은 하지 않고 있다. 압수수색 등 강제집행 시 자칫 훼손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이라는 평가가 나오자 배씨는 상주본을 반환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국가에 1000억원의 보상을 요구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상주본의 회수 여부는 결국 배씨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배씨가 상주본의 소재를 밝히지 않으면서 훼손과 분실 등이 우려되고 있다.
상주본은 지난 2015년 3월 배씨의 집에 발생한 불로 일부 훼손되기도 했다.
배씨는 이후 상주본을 자신만이 아는 곳에 보관 중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2017년 4월 불에 타 일부 훼손된 상주본 사진을 언론에 공개했다.

문화재청은 배씨를 달래기도 하고 강제집행 가능성도 열어놓고 회수 노력을 쏟고 있지만 배씨의 거액 보상 요구에 속앓이만 하고 있다. 배씨가 소재를 알려주지 않으면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배씨는 최근 상주본 반환 시 박물관 명예관장 자리와 예우를 해주겠다는 정부 측 제안에도 콧방귀만 뀌고 있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배씨의 언행으로 봐서 상주본을 쉽게 내놓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반환 독촉을 하면서 여차하면 배씨를 검찰에 문화재 은닉 및 훼손죄로 고발할 계획이다. 하지만 배씨는 여전히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국보급 보물이 한 고서적 수집가의 아집과 욕망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국가 공권력마저 법 집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망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상주=김재산 기자 jskimkb@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