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한·일 갈등 중재에 소극적인 까닭은…

입력 2019-07-16 07:44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역행하는,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뉴시스

우리 정부가 미국에 한·일 갈등 중재를 요청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소극적이다. 오바마 행정부 때 미국의 적극적 중재로 한·일은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로 인한 갈등을 봉합하고 외교적 합의에 도달한 것과 대비되는 상황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소극적 태도는 미국의 아시아 안보전략 변화와 동맹 외교 등한시, 일본의 저돌적인 워싱턴 여론 다지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을 다녀온 외교부 당국자는 15일 “미국은 현재 한·일 간 상황이 악화돼선 안 된다는 데 적극 공감했다”며 “어떤 합당한 역할이 있는지 검토해보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국 측은 한·일 모두 미국과 아주 가까운 맹방이기 때문에 한쪽 편을 들기는 어렵다는 솔직한 의견도 냈다”고 전했다.

미국은 한·일 갈등에 누구의 편을 들기도 어렵고, ‘인게이지먼트(관여)’ 하겠다는 입장이지 ‘중재’에 나서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과거 오바마 행정부 때 한·일 갈등을 중재, 한·미·일 3각 안보 공조체제를 공고히 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당시 미국의 막후 중재로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협의에 나서 2015년 12월 합의에 도달했다.

한·일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미국을 방문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오른쪽)과 윤강현 외교부 경제외교조정관이 지난 1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이 한·일 갈등 중재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중국을 견제하는 아시아 전략에서 한·미·일 3각 안보 공조체제와 한국의 중요성이 떨어진 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 맞서는 인도·태평양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안보전략이 인도·태평양전략으로 본격 전환됐지만 우리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 참여에 소극적이다. 반면 인도·태평양전략에 적극적인 인도, 호주,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미국에 더욱더 중요해졌다. 이에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을 일본과 억지로 화해시켜 안보 공조체제로 끌어들일 유인이 떨어진 것이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한국은 인도·태평양 전략 핵심서 비켜선 상태기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 때와 다르게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갖는 전략적 이익이 덜 중요해졌다”며 “또 미국은 과거와 같은 한·미·일 3각 안보 공조체제가 대(對) 중국 견제 정책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을 가지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통적인 동맹 외교와 다자주의 외교 등을 등한시하는 성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해 쓸모없는 낡은 동맹이라고 비난하는 등 미국의 입맛에 맞는 양자 관계만 추구해왔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 자체 성향이 양자 관계와 경제이익을 중시한다”며 “미국의 경제이익에 한·일 갈등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판단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적극 개입하는 걸 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도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1대 1 양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선호한다”며 “한·일 갈등이 미국의 경제·안보 이익에 직접적인 손해를 미치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뉴시스

일본이 워싱턴 정가에서 발 빠르게 여론 다지기에 나서 미국이 적극 중재에 나서거나 한국 편을 드는 것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전 정지작업을 통해 중재에 소극적인 미국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워싱턴 정가 여론을 일본 편으로 끌어들인 후 한국에 대한 압박에 나섰다는 관측이다.

국립외교원장을 역임한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는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워싱턴 조야에서 공공외교 등을 통해 이번 수출규제 조치의 필요성을 얘기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