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챔피언’ 한국 여자축구, 9년 만에 왜 무너졌나

입력 2019-06-17 11:31 수정 2019-06-17 12:16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 장슬기가 12일 프랑스 그르노블의 스타드 데잘프에서 열리고 있는 2019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 나이지리아와의 조별리그 A조 2차전 경기에서 볼을 몰고 질주하고 있다. AP뉴시스

9년 전, 세계무대를 제패했던 맹렬한 기세는 없었다.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10년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에서 정상을 차지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우승은커녕 24강 조별탈락 위기에 처했다. 2019 프랑스여자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 얘기다.

한국은 18일 새벽 4시(한국시간) 노르웨이와의 프랑스여자월드컵 A조 조별리그 최종전을 앞두고 있다. 상황은 좋지 않다. 프랑스, 나이지리아와의 앞선 두 경기에서 0대 4, 0대 2로 완패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프랑스를 상대로는 볼 점유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나이지리아에는 역습 두 번에 수비진용이 무너졌다. 세계 무대에서 허술한 수비조직력만 실감했다.

실낱같은 16강 진출 가능성은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산술적인 경우의 수다. 프랑스(승점 6), 노르웨이, 나이지리아(이상 승점 3)에 이어 A조 최하위를 기록한 한국은 노르웨이와의 최종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같은 시각 프랑스가 나이지리아를 꺾어주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 나이지리아, 노르웨이는 모두 1승 2패로 같은 승점을 기록하며 골 득실을 따지게 된다. 하지만 한국은 단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한 채 6실점을 내주며 이마저도 가장 불리한 형국에 놓였다. 북유럽 강호로 대표되는 노르웨이를 상대로 대량득점을 노리기에는 쉽지가 않다. 한국을 상대로 4골을 몰아친 프랑스가 노르웨이에 16개의 슛을 퍼부었음에도 필드골은 단 1골에 그쳤을 정도다.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 공격수 이민아가 12일 프랑스 그르노블의 스타드 데잘프에서 열리고 있는 2019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 나이지리아와의 조별리그 A조 2차전 경기에서 볼을 잡아내고 있다. AP뉴시스

한국은 2010년 U-17 여자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고, 같은 해 U-20 여자월드컵에서도 3위를 차지했다. 우승을 차지하며 ‘황금세대’로 불렸던 선수들은 지금 성인 대표팀의 주역이 됐다. 여민지, 장슬기, 이금민, 이소담이 그들이다. 9년 전 여자축구의 신흥 강호로 떠올랐던 한국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부족했던 준비다. 최종전을 앞둔 15일 머물고 있던 호텔 숙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아쉬움을 토로했던 선수단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소담은 “세계의 벽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우리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 세계 여자축구는 훨씬 빨라졌고, 강해졌다”고 말했다. 주전 윙백으로 활약 중인 장슬기는 “한국 여자축구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노력을 해야 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들 모두 9년 전 연령별 대회에서 정상에 섰던 선수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입을 모아 ‘발전이 없었다’고 얘기했다. 2015년 캐나다 대회 16강 이후 지난 4년간 한국 여자축구가 치른 A매치는 단 5번이 전부였다. 선수들이 발을 맞춰보며 조직력을 가다듬을 시간이 부족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둘째는 신체조건의 열세다. 첫 상대였던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국가들은 180㎝ 이상 장신의 선수들이 다수 포진돼 있다. 반면 한국은 23명의 선수 중 170㎝를 넘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지난해까지 여자축구대표팀 수석코치로 활약했던 정성천 성균관대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여자축구는 공간, 속도, 피지컬이 우월할 경우 기술이 좋아도 당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참패를 거듭 중인 이번 대회의 실패 원인으로 피지컬적 문제를 지적한 셈이다.

셋째는 WK리그의 경쟁력 약화다. 2009년 개최돼 10년이라는 짧은 역사가 있는 국내 WK리그는 8개 구단이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 현대제철이 6연속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내부 경쟁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2017년 여자축구의 명문 이천대교까지 해체됐다. 출범 후 10년이 채 되지 않아 3개 팀이 해체됐을 정도로 리그 상황이 열악하다. 2011년 대한축구협회에 등록한 여자선수는 초등학생부터 WK리그 선수까지 모두 1629명. 리그가 진행되며 늘어야 할 선수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지난해 협회에 등록된 여자선수는 1539명이다. 좁은 경쟁 속에 발전도 없고, 저변도 좁다. 장슬기는 이번 대회에서 “WK리그가 더 발전해야 한다”며 내실 강화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한국은 2023년 여자월드컵 유치에 도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다. 곧바로 다음에 치러질 대회다. 국제사회에서 호응을 얻기 위해 ‘남북 공동개최’라는 카드도 준비했다. 목표하는 2023년 여자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라도 이번 대회에서 어느 정도 성과는 얻어내야 한다. 윤덕여 감독은 17일 경기 전 마지막 기자회견에 참석해 “마지막 한 경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경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노르웨이전 필승을 다짐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