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용호가 새 역사를 썼다.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대회에서 한국 축구 사상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다. 정정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은 12일 폴란드 루블린 스타디움에서 에콰도르와 가진 2019 FIFA U-20 월드컵 준결승에서 1대 0으로 승리했다. 1983년 멕시코 대회 이후 36년 만에 4강에 오른 뒤 파죽지세로 우승 문턱까지 올라섰다.
정 감독의 성공담은 한국축구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부정부패와 비리는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외국인 감독 사대주의와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이 우대받는 분위기가 아직 한국축구에 남아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감독의 명성은 라커룸을 장악할 수 있는 큰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 감독의 선수 시절은 평범했다. 부상 때문에 30세에 이르기도 전에 은퇴를 선언했을 정도로 선수 경력은 짧았다. 1997년부터 6년간 이랜드 푸마에서 중앙 수비수로 뛴 것이 경력의 전부다. 흔히 불리는 ‘엘리트’ 출신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랬던 감독이 FIFA 주관대회에서 결승 고지를 밟은 최초의 한국인 감독이 됐다.
정 감독은 2006년 연령별 대표팀에서 코치로 처음 지도자 발걸음을 뗐다. 이후 U-14 청소년대표팀 코치, U-13 청소년 대표팀 감독 등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며 지금까지 올라왔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천천히 성장해온 인물이다. 은퇴 직후 지도자 자격증을 딴 뒤 곧바로 A 대표팀이나 유명구단 코치에 부임해 감독까지 밟아나가는 스타 선수 출신 감독들과는 차이가 있다.
주로 낮은 연령대 대표팀만 전전한 까닭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대한축구협회는 지도자 공백이 생길 때마다 정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초라해 보이는 선수 경력과 별개로 일찌감치 지도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정 감독의 수많은 감독 대행, 임시 감독 등의 이력은 이렇게 탄생했다.
어린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내실을 다져온 지도력은 U-20 월드컵에서 제대로 녹아들고 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전술적 대처를 할 줄 알며, 선수단을 아우르는 지도력도 갖췄다. 경기에 앞서 언론을 대하는 태도 역시 능숙하다.
결승에 오르며 2016년 대한축구협회와 했던 그의 인터뷰가 온라인에서 관심을 받기도 했다. 당시 정 감독은 “U-17, U-20 월드컵 같은 메이저대회에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하는 것이 꿈이다”며 “모든 게 완성된 선수는 흥미 없다. 아직 덜 완성된 유소년 선수들을 만들어내 메이저대회 성적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꿈이 이뤄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3년. 정 감독은 지금 정상을 앞두고 있다.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U-23 대표팀 김학범 감독 역시 다르지 않다. 특별한 선수 시절을 보내지 않았지만, 지도자로서 음지에서 오랜 기간 묵묵히 준비했다. 그 내공으로 구단과 대표팀 코치, 감독을 잇달아 오가며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두 감독의 성공신화는 한국축구 지도자 문화에 막대한 시사점을 준다. 외국인 감독도, 특별한 선수 시절을 보냈던 감독도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제아무리 훌륭했던 선수라도 지도자의 역량과는 별개의 문제다. 반대로 평범한 선수였을 지라도 사령탑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축구계 비주류로 통하던 정 감독과 김 감독이 이를 증명했다.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는 굴곡의 시절 끝에 감독직을 떠났으며, 역대 가장 많은 트로피(49개)를 들어 올린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 감독 알렉스 퍼거슨 역시 선수 시절에는 우승을 차지해보지 못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