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 수비형 미드필더의 선발 경쟁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스페인 지로나 미드필더 백승호가 등장하면서다. 백승호는 1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이란과 1대 1로 비긴 국제축구연맹(FIFA) A매치에서의 파울루 벤투 대표팀 감독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벤투 감독은 베스트 11에 큰 변화를 두지 않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한 번 신뢰한 선수를 계속 중용하는 편이다. 수비형 미드필더와 중앙 수비수 포지션이 특히 그렇다. 선수기용 폭이 굉장히 좁다. 많은 경기에서 4-2-3-1 포메이션을 구성했는데, 그동안은 정우영과 주세종이 꾸준히 기회를 받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주세종이 아닌 백승호가 4-1-3-2 포메이션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격했다. 지난해 3월 대표팀에 처음 소집된 지 4경기 만이다. 벤투 감독은 새로운 선수를 실험하기보다는 기존 선수들이 갖춘 정체성을 우선하겠다고 꾸준히 강조해 왔다. 백승호가 그라운드를 밟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그래서다. 두 번의 소집을 통해 벤투 감독에게 직접 검증받는 시간을 가졌다. 신예 실험에 인색한 벤투 감독이 이란이라는 만만치 않은 아시아 강호를 상대로 선발 결정을 내린 것은 백승호가 훈련과정에서 확실한 인상을 줬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백승호가 대표팀 내부에서 실력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홀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선 백승호의 경기력은 합격점을 받을만했다. 차분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란 공격수들의 돌파를 차단했고, 수차례 전진 패스도 시도했다. 체격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와의 볼 경합도 피하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성장기를 보낸 선수답게 발기술을 활용해 좁은 공간을 잘 활용했다. 전반 중반에는 순식간에 상대 수비수 4~5명을 돌파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백승호가 가져다준 유연함은 벤투호 중원에서 그동안 찾아볼 수 없던 활력소가 됐다. 추후 선발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그간 벤투호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던 수비형 미드필더는 정우영이다. 벤투 감독이 정우영에게 특별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정황은 그의 출전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달 전까지 치른 벤투호 14번의 A매치 가운데 11경기에 나섰다. 첫 출범이었던 지난해 9월 A매치에도 발탁됐고 2019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했다. 부상 후유증으로 이달 A매치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추후 복귀한다면 선택지 중 맨 위에 있다. 여전히 중용될 가능성이 크다.
벤투 감독이 수비형 미드필더를 몇 명 기용할지도 관심사다. 지난 아시안컵 때 까지만 해도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두는 4-2-3-1 대형을 계속 활용해왔다. 하지만 지난 3월을 기점으로 한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만 두는 4-1-3-2도 꾸준히 활용 중이다. 손흥민의 물오른 결정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공격 재능과 활동량을 갖춘 3명의 미드필더를 전진시키며 전방위적인 압박을 구사하는 4-1-3-2 대형에서 수비적인 뒷감당을 버텨내 줄 ‘1’라인의 역할은 막중하다. 현재까지 흐름으로 봤을 때 예전처럼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기용하기보다는 한 명만 두는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백승호가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꿰차기 위한 내부적인 경쟁이 치열해졌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진현도 이 자리에 뛸 수 있으며 붙박이로 활약했던 정우영이 곧 돌아온다. 수비적인 안정감이 있으며 편안한 미드필더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주세종은 전술적으로 절대 버릴 수 없는 선택지다. 출중한 미드필더 자원들이 여럿 있다는 것은 대표팀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들을 손에 쥔 벤투 감독의 행복한 고민이 시작됐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