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사리의 한 해가 가네…케파의 큰 그림(?)

입력 2019-05-30 17:14 수정 2019-05-30 17:22
마우리시오 사리가 30일 2018-2019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우승컵을 들고 있다. 게티이미지

잉글랜드 프로축구 첼시의 사령탑 마우리시오 사리의 한 시즌이 끝났다. 그에게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다사다난한 한 시즌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받아낸 성적표는 훌륭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고,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00년 이탈리아에서 1군 사령탑으로 데뷔한 이후 사리 감독의 첫 우승 트로피다.

첼시는 시즌 초반 무패행진을 달렸다. 선전과 함께 잉글랜드에서는 첼시의 ‘사리볼’ 열풍이 불었다. ‘사리볼’은 짧은 패스를 통해 많은 볼 소유를 하고 수비 시에는 높은 라인부터 강한 전방 압박을 구사하는 사리 감독 특유의 축구 시스템을 뜻한다. 이탈리아 나폴리 SSC에서 사리 감독과 함께 했던 조르지뉴는 첼시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맨체스터 시티, 리버풀과 함께 우승 레이스를 달렸다.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리볼에 대한 전술적 약점이 노출되며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부진에 빠졌다. 자신의 축구 철학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편인 사리 감독의 전술적 고집은 아집으로 비판 받았다. 유연한 전술적 대처를 하지 못하며 답답함을 보였다.

진짜 문제는 내부에서 터졌다. 사리 감독이 라커룸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며 선수단의 태업, 항명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팀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지난 2월, 첼시가 6위까지 내려앉자 사리 감독에 대한 여론은 완전히 돌아섰다. 분노한 팬들은 사리 감독의 경질을 요구하고 나섰고, 현지 매체들 역시 그의 경질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차기 사령탑 후보군까지 거론됐다.

지난 2월 2018-2019 잉글랜드 풋볼리그컵 카라바오컵 결승전이 사리 감독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우승하지 못한다면 사리 감독 경질은 기정사실이 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첼시는 승부차기 혈전에서 맨체스터 시티에 패하며 끝내 우승컵을 놓쳤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판도가 달라졌다. 당시 결승전에서 골키퍼 케파 아리사발라가가 초유의 항명사태를 벌였다. 사리 감독은 연장 후반 종료 직전, 케파의 몸 상태에 이상이 있다고 판단해 곧바로 백업 골키퍼인 윌리 카바예로와 교체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케파는 이를 당당히 거부했고 오히려 교체하지 말라는 제스처까지 보냈다. 지안프랑코 졸라 수석코치가 나서 케파에게 그라운드에서 나올 것을 조언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라운드에서 명백한 월권이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마우리시오 사리와 케파 아리사발라가가 30일 2018-2019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서로 포옹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경질론은 단숨에 동정론으로 변했다. 항명사태를 목격한 수많은 시청자와 웸블리 스타디움을 꽉 채웠던 관중들은 대부분 사리 감독의 편에 섰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리 감독의 경질설 역시 수그러들었다. 이후 첼시는 프리미어리그에서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리다 경쟁팀들의 부진이 겹친 행운 끝에 3위를 차지했다. 자력으로 차기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한 데 이어 유로파리그에서마저 챔피언에 올랐다.

잉글랜드 런던의 맞수로 대표됐던 아스널까지 유럽 대항전 결승에서 꺾은 이상 사리 감독의 임기는 연장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가 직접 영입한 조르지뉴와 곤살로 이과인을 비롯해 다비드 루이즈와 안토니오 뤼디거 등 많은 선수가 아직 사리 감독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첼시는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선수 영입 금지 징계를 받은 만큼 원하는 지도자를 선임하기도 어렵다. 구단 수뇌부로서도 섣불리 사리 감독을 경질하기 어려운 이유다. 경질한다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특별한 후보군도 없다. 결국 케파의 항명이 첼시에서 사리 감독을 살리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사리 감독은 30일 유로파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자신의 거취를 묻는 말에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다음 시즌에도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의견으로는 충분치 않다. 구단이 결정할 일이다”라고 밝혔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