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탈레반’ 출소에 미국 긴장, 트럼프 “주시할 것”

입력 2019-05-24 13:49 수정 2019-05-24 15:53
존 워커 린드가 파키스탄 이슬라바마드 인근 반누시 이슬람종교학교에서 공부하던 당시의 사진. 린드는 2001년 말 탈레반에 합류했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한 미군에 붙잡혔다. AP뉴시스


‘미국인 탈레반’으로 유명한 존 워커 린드(38)가 출소했다. 린드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에 합류했다가 미군에게 붙잡혀 17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인물이다. 미국 내에서는 그가 여전히 극단적 이슬람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 사회가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 극단주의에 가담했던 자국민들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인지 시험대에 올랐다.

린드는 23일(현지시간) 미국 인디애나주 테레호테 연방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그는 2002년 탈레반 합류와 불법무기 소지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모범수로 분류돼 기존 형기를 3년 남긴 이날 조기 출소했다.

린드의 조기 출소 소식은 미국 사회를 불안에 빠뜨렸다. 그는 이슬람국가(IS)에 합류한 서구권 시민들보다 15년 이상 앞서 이슬람 극단주의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린드는 불교도 어머니 아래에서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16살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1960년대 급진적 흑인해방운동을 이끌었던 맬컴 엑스의 자서전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린드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지 1년 만에 예멘으로 건너가 탈레반과 접촉했다. 20살이었던 2001년에는 탈레반 무장조직의 일원이 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군에 맞섰다.

그는 곧 현지 반(反)탈레반 연합체 북부동맹과 교전하다가 붙잡혀 미군에 인계돼 아프간 북부 마자르이샤리프 인근 수용소에 수감됐다. 여기에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 벌어진다.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마이크 스팬이 린드를 심문한 직후 수감자들의 폭동에 휘말려 살해된 것이다. 린드는 스팬을 살해하는 데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스팬의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주장을 믿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7년 만에 출소한 린드가 여전히 극단주의 성향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포린폴리시는 2017년 국가테러센터보고서를 인용해 그가 “세계적인 이슬람 극단주의단체들을 계속 옹호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자의 글을 쓰고 번역했다”고 전했다. IS와 그들이 시리아 일대에 세웠던 칼리프국가(이슬람 신정일치)에도 찬사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린드는 3년간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다. 그는 의무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하고 극단주의 이슬람 관련 자료는 소지는 물론 열람도 하지 못한다. 온라인에서는 영어로만 활동할 수 있고, 당분간 미국을 떠나는 일도 허락되지 않는다.

존 워커 린드(오른쪽)가 2001년 12월 1일 아프가니스탄 마자르이샤리프 수용소 앉아있다.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고 얼굴도 씻지 못한 모습. 당시 린드르 포함한 탈레반 재소자들은 폭동을 일으켜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마이크 스팬을 살해했다. AP뉴시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린드의 출소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유럽에서는 이미 과거 극단주의 혐의로 수감됐던 이들이 재차 테러를 벌이는 일들이 많았다. 2015년 프랑스 풍자만평 잡지사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에는 여전히 이슬람 극단주의자 108명이 수감 중이다. 린드에 대한 여론이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린드가 조기 출소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법률자문을 구했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린드를 면밀히 지켜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린드가 조기 출소한 것은 비양심적인 일”이라며 “그는 여전히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론도 제기된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제이슨 레자이안은 ‘린드는 법이야말로 테러리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린드가 정확한 법 절차에 따라 조기 출소했다고 지적했다. 레자이안은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정의는 맹목적이었다”며 “이 쓰라린 사건 속에서 단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린드의 석방이 법치주의를 지켰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