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중국 선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대북 민간단체들과의 실무접촉을 협의 당일 오전 돌연 취소했다. 북한이 미국의 자국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호’ 몰수 조치 관련 강력 항의를 이어가던 상황이라 북·미 간 긴장 관계가 남북 대화 재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남측위)와 사단법인 겨레하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등 대북 민간단체들은 당초 23일부터 26일까지 순차적으로 북측 민간단체들과 실무접촉을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북측은 이날 오전 실무접촉을 취소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실무진을 철수시켰다.
선양 현지에 나가 있는 남측위 관계자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오늘 아침 북측으로부터 취소 사실을 통보 받았다”고 전했다. 다른 민간단체 관계자도 “북측으로부터 ‘예정됐던 회담을 취소한다’는 통보가 왔다”고 말했다. 북측은 취소 사유로 ‘제반정세상의 이유’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측위는 이날 오후 늦게 보도자료를 내고 “남측위 대표단은 선양에서 북측위 및 해외측위와 만나 현 정국과 남북공동선언 이행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며 “6·15 (남북)공동위는 민족자주의 입장에서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것이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길이라는 데 뜻을 같이 하고, 선언 이행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다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실무협의 취소와 관련해 북측 대표단은 “남북관계 소강국면에 대한 진단과 과제를 논의하자는 취지에서 민간단체 협의를 추진했으나 남측의 언론보도 등에서 근본적 문제를 제외한 채 부차적 의제들만 거론되는 등 협의 취지가 왜곡되고 있는 점을 우려해 취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고 남측위는 전했다.
북측이 남측과의 실무협의를 접촉 당일 취소한 것은 북한 화물선 몰수 조치와 관련한 북·미 간 신경전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대성 주제네바 북한대표부 대사는 2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미국의 와이즈 어니스트호 압류가 북·미 관계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미국식 힘의 논리나 압박이 통하는 나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심대한 계산 착오”라면서 “미국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미국이 큰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국과 대화하는 문제나 제재 해제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은 지난 21일(현지시간)에도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와이즈 어니스트호 반환을 요구했다.
와이즈 어니스트호는 북한산 석탄을 싣고 운항하다 지난해 4월 인도네시아 인근에서 적발된 뒤 미국에 압류돼 지난 11일 미국령 사모아로 예인됐다.
북한의 민간단체와의 접촉도 급작스럽게 취소하면서 개성공단 기업인 방북에도 적신호가 켜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정부는 기업인 방북 문제와 관련해 계속 협의 중이지만 아직까지 북측으로부터 방북 수용 의사는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 계획은 조속히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현재 800만 달러 공여 관련 국제기구의 사업제안서 내용에 대해 협의 중”이라며 “보통 공여가 이뤄지고 나서 물품 구매하는 등 절차가 통상 3∼6개월 정도 소요된다. 시급성을 감안해 그걸 최대한 앞당기겠다는 게 저희 생각이고 그렇게 국제기구와 협의해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도 이날 천태종 문덕 총무원장을 예방한 자리에서 “북한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고, 국제기구의 지원 요청이 있는 상황에서 적절한 지원 방식을 검토하기 위해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대성 대사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식량 원조가 있다면 좋지만 없다고 해도 우리는 그럭저럭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대사는 “문제는 유엔의 (대북)제재”라며 “식량을 수입하고 대금을 치를 수가 없는데,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