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는 한때 ‘위대한 폭로자’ ‘열린 사회의 수호자’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미국 기밀문서를 무차별적으로 인터넷에 공개한 행위 때문에 미국은 물론 서방 국가들로부터 ‘스파이’ ‘안보의 적’이라는 비난을 함께 받아왔다.
세계적인 명성을 과시하던 어산지가 몰락의 길로 처음 들어선 건 2010년 스웨덴 방문 당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으면서다. 당시 영국 런던에 머물던 어산지는 스웨덴 송환을 거부하다가 결국 2012년 영국 주재 에콰도르대사관에 망명하면서 7년간의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어산지는 망명 중에도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진영의 이메일을 유출하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반미 성향으로 어산지의 망명을 흔쾌히 받아줬던 라파엘 코레아 전 에콰도르 대통령이 물러나고 중도 성향 레닌 모레노 신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에콰도르 측과의 갈등까지 심화됐다. 결국 에콰도르 정부가 망명자 신분을 전격 철회함으로써 어산지는 영국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어산지가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건 2010년 브래들리 매닝 미 육군 일병이 몰래 빼낸 1.6기가바이트 분량의 미국 정부 기밀문서 전체를 위키리크스에 올리면서다. 매닝이 유출한 자료 중에는 2007년 미군 헬기가 이라크 바그다드 공습에서 로이터통신 기자 2명을 포함한 민간인을 살해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도 포함돼 있었다.
이 동영상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벌인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잔혹성과 부도덕성이 재확인됐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는 이어 다국적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 살해를 저질렀다는 등의 민감한 내용을 담은 9만 페이지 분량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지(Afghanistan war logs)’를 폭로하기도 했다.
불똥은 한국으로도 튀었다. 매닝 일병이 유출한 자료 중에는 세계 각국 소재 미국대사관이 국무부 본부로 발송한 비밀전문들도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는 2008년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당시 국회의장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한국 주재 미국대사와 만나 “MB는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고 한 발언 등 한국 정치인들이 미국대사와 비공개 석상에서 나눴던 대화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한국 고위 관료와 정치인에 대한 인물평, 한국 내 정세분석 등 한국에 대한 미국의 ‘본심’을 엿볼 수 있는 문서들도 그대로 유출됐다.
이런 외교전문은 작성 후 수십 년이 지나 비밀로서 효력이 사라진 뒤에 공개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생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국의 외교전문들이 대량으로 풀리면서 미국은 외교적 망신까지 당해야 했다.
미국은 어산지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해 1급 수배령을 내렸다. 마침 어산지가 2010년 8월 세미나 참석차 스웨덴에 갔다가 여성 2명을 성폭행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여러 석연치 않은 정황을 미뤄, 어산지를 미국으로 강제 송환하기 위해 성폭행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영국에서 체포된 어산지는 스웨덴 송환을 거부하던 끝에 2012년 보석 기간 중 에콰도르 대사관을 찾아 망명 신청을 했다. 하지만 어산지는 대사관 밖을 둘러싼 영국 경찰 때문에 에콰도르로 가지 못한 채 결국 7년간의 대사관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어산지의 대사관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를 제공받아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관리하는 등 무리 없이 업무를 처리했다. 대사관 안에서 레이디 가가와 같은 유명인을 만나고 CNN 등 미국 유력 매체와도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나섰다. 이는 어산지 망명 당시 에콰도르 현직 대통령이었던 반미 성향 코레아 전 대통령의 비호 덕에 가능했다.
어산지는 대사관 망명 중에도 위키리크스를 통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위키리크스는 미국 대선 기간이었던 2016년 7월 민주당 전국위원회 내부에서 오간 이메일 해킹 자료 1만9000여건을 공개했다. 이메일에는 민주당 지도부가 힐러리 전 장관의 경선 맞수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조롱하고 힐러리 전 장관 측에 유리하게 경선 관리를 한 정황이 담겨 있었다.
민주당 이메일 해킹 사건은 결국 민주당 내 분열을 유발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기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위키리크스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정치적 약점인 ‘러시아 스캔들’의 단초가 된다. 러시아 정보기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돕기 위해 민주당 이메일을 해킹하고 이를 위키리크스에 전달했다는 미국 당국의 수사 결과가 나온데 이어, 트럼프 대통령 측이 대선 기간에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어산지는 에콰도르 정부에게도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고 있었다. 에콰도르 대사관은 건물이 비좁아 어산지 같은 유명 망명객이 오랫동안 머물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아티카 슈버트 CNN 국제담당 선임기자는 11일(현지시간) “대사관 건물은 작다. 고작해야 방 몇 개와 책상이 있을 뿐”이라며 “그곳은 (어산지와 에콰도르 외교관) 모두에게 감옥과도 같은 곳이 됐다”이라고 전했다.
에콰도르 정부는 어산지가 좁은 대사관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축구를 했으며 보안요원들과 다투기도 했다고 밝혔다. 어산지는 대사관 벽에 대변을 바르는 행위도 했다고 한다. 2012~2018년까지 에콰도르 정부가 어산지를 돌보고 신변보호를 해주는 데 들인 비용은 무려 620만 달러나 됐다.
특히 에콰도르 정권이 교체되면서 어산지는 에콰도르 정부의 호의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됐다. 2017년 취임한 중도 성향 모레노 대통령은 “국제 협약을 위반하면서까지 어산지의 망명을 계속 받아줄 수는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언급했다. 모레노 대통령 취임 이후 에콰도르 측은 어산지에게 소셜미디어상 정치적 의견 개진과 대사관 건물 내 스케이트보드 탑승 등을 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또 그가 키우는 고양이를 깨끗이 관리하라고도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모레노 정부가 파견한 외교관들은 어산지를 적대적으로 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산지는 지난해 10월 에콰도르 정부가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배했다. 어산지는 지난 3월 모레노 대통령의 형이 유령회사를 세워 돈세탁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모레노 대통령 가족의 사생활을 담은 사진을 유출했다. 결국 격분한 모레노 대통령은 어산지에 대한 망명 접수를 철회하고 영국 경찰이 대사관 건물에 들어와 그를 잡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기에 이른다.
어산지가 7년간의 망명 끝에 체포됐지만 그가 어떤 운명을 맞을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스웨덴 검찰은 이미 어산지의 성폭행 혐의 관련 수사를 중단하고 수배를 철회한 상태다. 영국 경찰은 어산지가 법원의 출석 명령에 불응해 보석 규정을 어겼다는 명분으로 그를 체포했다. 미국 법무부는 이미 어산지를 군사 기밀 유출 혐의로 기소한 상태다. 만약 어산지가 미국으로 송환돼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징역 5년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어산지의 미국 송환은 길게는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어산지는 유능한 변호사를 보유하고 있고 열성적 지지자도 상당수 거느리고 있다. 영국 정부 역시 그간 미국 정부의 범죄인 송환 요청을 잘 받아주지 않아왔다.
법적 논란도 있다. 우선 민간인에게 기밀 유출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문건을 유출한 매닝 일병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호주 국적의 민간인인 어산지에게 미국의 기밀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특히 어산지 지지자들 주장처럼 그의 지위를 언론인으로 간주할 경우,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도 불거질 수 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