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는 굉장히 크고 높은 바위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계곡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나지막한 오두막집들은 마치 막 심은 곡식들이 자라고 있는 밭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다만 유럽의 성 건축 모양을 본떠 지어진 낯선 외교관저들만이 이러한 단조로운 풍경 속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랬다. 1901년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한 지 25년이 되던 해다. 서울은 전근대의 이미지 같은 초가집이 바다를 이룬 가운데 근대 건축물인 서양식 외교관저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1901년 무렵에는 서양인들이 가져온 변화가 도시의 풍광을 아주 조금, 그러나 선명하게 바꾸며 조선인의 일상에 그렇게 틈입해왔다. 불과 7년 전인 1894년 “한 나라의 수도이면서도 현 산업 문명을 대표하는 공장도, 굴뚝도, 유리창문도, 계단도 없는”게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양이었다. 그런 한양에 지어진 서양식의 외교관저는 서양인의 존재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술 문화에서도 그러했다. 서양인들은 새로운 수요자로 등장했다. 수 백년 간 변화가 없었던 미술시장은 그들은 등장으로 인해 어떤 활기를 띄게 되었다.
480년 넘게 지속된 쇄국의 빗장이 열리고, 제물포 부산 원산 등 개항지와 대도시에는 외교관, 선교사, 의사, 사업가 등 여러 목적으로 온 외국인들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1904년 무렵의 제물포 거리를 찍은 사진을 보자. 2층짜리 일본식 상가 가옥 내 일본인 운영하는 사진관 간판엔 ‘TAKESITA’S PHOTOGRAPHER(다케시타 사진관)’이라고 영어 알파벳이 선명하다. 이 사진관의 주 타깃 고객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닌 서양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서양인들이 도자기든, 민화든, 민속품이든 미술로 분류될 수 있는 무언가를 사고자 했던 새로운 유형의 미술 수요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유럽이든, 아프리카든 외국에 나갔을 때 기념이 될 만한 이국적인 뭔가를 사고자 하는 열망과 같다. 그리고 이들의 열망은 기념품이나 사고자 하는 것 이상이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한 장의 삽화를 보라. 중절모를 쓴 외국인 신사가 조선백자 항아리를 들고 조선인 상인들과 흥정을 하고 있다. 갓을 쓴 조선인 상인 2명의 태도가 짐짓 여유를 가장하고 있다. 그 가격엔 팔 의향이 없다는 듯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몸이 단 쪽은 서양인으로 보인다. 서양인들이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사고 싶어 하는 품목임을 상인들은 알아차린 것 같다. 낯선 서양인의 출현은 그 자체가 구경거리여서 코흘리개 동네 아이들이 이 흥정의 현장을 빙 둘러섰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서양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미술품 거래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1909년 12월 영국의 「더 그래픽」에 실렸던 이 삽화는 개항 이후 서양인의 등장이 한국의 미술 시장에 끼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미술시장이 출현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시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일정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일어나는 추상적인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미술시장은 미술품이라는 구체적인 재화, 미술품 제작이라는 구체적인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필자는 한국 근대미술시장의 형성사를 다루면서 그 서술을 개항기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 미술시장이 전근대적 성격을 벗어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근대적 성격으로 이행한 시점이 이때부터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자본주의’ 등식에 따른 것이다. 근대에는 시장참가자들이 전근대적인 명령적 생산 체제의 국가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시장에서 이윤을 목적으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한다. 모든 재화는 상품으로 생산되어 수급 논리에 따라 시장에서 화폐가치로 교환된다. 시장경제 하에서는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이 시장 주체에게 참여의 동기를 부여해 제도적 창안과 혁신, 기술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동인(動因)이 된다. 이는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가 우위를 점하는 사회를 근대로의 이행으로 보았던 스위지(Paul Sweezy)의 주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미술시장에 대입하면 자유 경쟁 하에서 화가들이 수요자의 취향과 구입 목적을 염두에 두고 상품으로서 미술품을 제작 판매하는 방식이 주류가 될 때를 근대적 미술시장의 출발기라고 볼 수 있다. 화가가 국가에 예속되어 공납으로서의 미술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인의 신분이 돼 미술시장에서 불특정 수요자를 대상으로 상품으로서의 미술품을 제작하는 사회를 근대적 미술시장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후원경제 하에서는 예술의 수요자(왕, 종친)와 예술의 생산자(화가)가 직접적으로 연결되나 시장경제에서는 중개자를 통해 다수의 수요자와 매개된다.
한국 근대 미술시장의 기점은 학자마다 다를 것이라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필자는 한국 근대 미술시장의 기점과 관련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기보다 개항 이후부터 매 시기별로 새롭게 등장하는 수요자에 자극 받아 생산자인 화가, 중개상인 화상(畫商)들이 만들어내는 미술시장의 각종 제도의 등장과 진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는 이제는 일상에 자리 잡은 갤러리, 전시회, 골동품 가게, 박물관, 미술품 경매회사 등 근대적인 미술제도들이 언제 어떻게 등장하고 발전해왔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좁게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우리나라에서 화랑의 탄생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개항기는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가장 격동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지금은 한국의 대표하는 최고의 고미술품으로 인정받는 ‘미술로서의 고려청자의 발견’이 이때 이뤄졌으며, 갤러리의 전신인 ‘서화관’ 등이 이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근대의 조선시대, 화가는 두 부류였다. 왕실에 소속되어 왕실과 관(官)에서 필요로 하는 초상화, 지도, 기록화 등의 그림을 그리는 직업화가로서의 화원화가가 하나다. 또 교양과 취미적 여기(餘技) 삼아 그림을 그렸던 문인화가가 다른 하나다. 여기에 시중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제3의 직업화가들이 전근대사회에서도 존재하였으나, 시장이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를 테면 ‘한국의 고흐’로 불리는 17세기의 시정 화가 최북은 그 기인적인 삶을 떠나 문인화가도, 화원화가도 아닌 새로운 유형의 미술 생산자의 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되어야 한다. 또 금강산 그림이 큰 인기를 끌었던 18세기의 선비화가 겸재 정선도 역시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이를 통해 생계를 영위한 민간인 화가로 볼 수 있다. 최북, 정선 등의 스토리는 17∼18세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미술 수요가 증대하면서 직업 화가의 증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규모가 얼마였는지 가늠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명의 직업화가들은 민화 수요에 응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8세기∼19세기 전반 한양의 ‘광통교(廣通橋) 그림가게’는 외부 충격 없이 자생적으로 근대적 유통공간인 화랑과 근대적 직업화가의 맹아가 자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광통교 아래 각색 그림 걸렸구나/ 보기 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과 곽분양(郭汾陽) 행락도며 강남금릉 경직도(耕織圖)며 한가한 소상팔경 산수도 기이하다./다락벽 계견사호(鷄犬獅虎), 장지문 어약룡문(魚躍龍門)…”
1844년 지어진 이 「한양가」에는 청계천 광통교 아래 민화 가게에 걸린 민화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들 민화는 병풍으로 만들고 장지문이나 다락의 벽 등에 붙여서 집안도 꾸미면서 자식 많이 낳거나 복을 누리고 출세하고 싶다는 소망도 담을 수 있는 길상화다. 이런 가정집들의 수요에 응해 민화 그림을 파는 직업 화가들이 존재했음을 증거 하는 글이다. 광통교의 그림가게는 시전의 한 종류인 ‘서화사((書畵肆)’를 말한다. 각종 생필품을 사고파는 시전(市廛)에서 그림이 상품처럼 판매되고 있는 것인데, 이전과 다른 이 현상은 근대성을 담지하고 있다.
광통교 서화사는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기성품이 판매되는 유통 공간의 출현, 이곳에서 판매되는 민화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민간 직업 화가의 존재, 서울의 상업화․도시화에 따른 장식 그림 수요자로서의 상업 부유층의 존재를 웅변한다. 미술시장의 3요소인 생산․중개․수요 모두 근대성이 포착이 된다.
그러나 광통교 서화사를 가지고 근대미술시장의 보편적 양태가 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지닌다. 우선, 전근대적인 미술 생산자인 화원화가와 문인화가가 이때까지 건재하였다. 특히 문인화가는 양반층 외에 중인층에서도 새롭게 출현하여 오히려 확산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와 달리, 개항기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화가들의 시대가 본격화된 시대다. 전근대의 두 부류 화가, 즉 정부 녹봉을 받는 화원화가와 취미로 그리는 문인화가의 존재 기반이 와해된 시기였다. 우선 화원화가들은 왕실의 미술 담당 기관인 도화서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되며 거리로 내몰렸다. 신분제 역시 폐기되어 양반과 중인층을 중심으로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문인화가도 설 자리를 잃었다. 이제 화가라면, 18세기 이후 서서히 등장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화가가 유일한 존재 방식이 된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 근대미술시장의 탄생 과정을 돌아보는 이 글이 개항기(開港期)에서 출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 시기부터 화가들의 태도와 작업 방식에서는 미술 ‘상품’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경제적 동기가 뚜렷이 보인다. 화가들은 서양인이 새로운 미술 수요자로 등장하자, 이들의 취향에 맞춘 ‘수출화(輸出畵)’를 창안해 개항장과 대도시에서 판매하였다. 유통공간의 측면에서도 통제적인 시장경제체제인 시전(市廛)이 폐기됨에 따라 상인들은 자유 경쟁에 따라 점포를 운영하였다. 화랑의 맹아인 ‘서화포’가 이 시기에 출현하였는데, 이는 상인들은 중국과 일본의 제도를 본 뜬 것이다.
이처럼 미술품이 자본주의적인 교환가치를 갖고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시기가 개항기이다. 그 때로 날아가 상투 튼 남정네들이 외국인과 마주치는게 낯설지 않았을 개항기의 한양 종로로 어슬렁 걸어가보자.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