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두 번째 정상회담 결렬 책임을 놓고 ‘진실게임’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전면 제재 해제를 요구해 부득이 협상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리용호 외무상을 내세워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제재 일부 완화였을 뿐이었다며 미국에 협상장 복귀를 촉구했다. 진실 공방이 양측 실무진 간 신경전으로 번지면서 북·미 대화 재개 전망은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
리 외무상은 1일 0시(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우리가 요구한 것은 전면적 제재 해제가 아닌 일부 해제였다”면서 “구체적으로는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2017년까지 채택된 5건, 이 가운데서도 민수경제 항목에 해당하는 것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리 외무상의 심야 기자회견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지 12시간 만에 이뤄졌다. 북·미 정상 간 두 번째 핵 담판이 끝내 결렬되자 고심 끝에 협상 내용을 언론에 공개해 국제사회 여론전을 시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리 외무상은 “이것은 조(북)·미 양국 사이의 현재 신뢰 수준을 놓고 볼 때 현 단계에서 내디딜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의 비핵화 조치”라고 강조했다.
리 외무상이 언급한 제재 결의 5건은 2016년에 채택된 결의 2270호와 2371호, 2017년에 채택된 2371호, 2375호, 2397호를 뜻한다. 북한은 단 2년 동안 핵실험만 세 차례 실시했으며 미사일도 수십 차례 발사하는 등 한반도 정세를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에 대응해 당시 채택됐던 결의들은 북한의 핵심 자금원인 석탄과 수산물 수출, 해외노동자 송출을 금지하고 석유 공급도 크게 제한하는 등 전례 없이 강력한 조치들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이 5건의 제재 결의는 제재 분야의 ‘끝판왕’으로 평가받는다. 이 제재들이 해제될 경우 남는 대북 제재는 북한의 핵·미사일 기술 개발을 방해하고 재래식 무기와 사치품 거래를 차단하는 수준으로 크게 떨어진다. 특히 2017년 채택된 결의 3건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중국을 강하게 압박해 이끌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제재 조항들을 속속들이 파악하지는 못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북한 측 요구사항을 ‘전면 해제’로 받아들일 만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리 외무상 발언이 공개된 이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측의 기본적인 요구사항은 완전한 제재 해제(full sanctions relief)였다”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이 5건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세계 각국의 독자 제재까지 포함해 촘촘히 짜인 대북 제재망 중에서는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다. 엄밀히 따지면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북한 측 전략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려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은 영변 핵시설을 전면 폐기하는 대신 미국이 제재 일부를 완화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선의를 갖고 ‘전면 폐기’와 ‘일부 완화’를 교환하자고 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국제사회에 잘못된 정보를 설파하고 있다는 게 북측의 논리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리 외무상 회견 직후 열린 질의응답에서 “100%가 아니라 민생 관련 부분만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 부상은 “제가 수뇌(정상)회담을 옆에서 보면서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김 위원장)께서 미국이 하는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지 않았나,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서 “지난시기 있어보지 못한, 영변 핵 단지를 통째로 폐기하는 제안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민수용 제재 결의, 부분적인 제재 결의까지 해제하기 어렵다는 미국 측 반응을 보며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앞으로 조·미 거래에 의욕을 잃지 않으시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노이=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