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위해 삶 바친 김복동 할머니… 꼿꼿했던 지난날 되짚어보기

입력 2019-01-29 13:15 수정 2019-01-29 15:12
뉴시스

고(故)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상징이었다. 위안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변영주 감독은 김 할머니를 두고 “한 걸음을 걷기로 결심하고 그녀는 세상 모든 피해 여성의 깃발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28일 오후 10시41분 향년 93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딸만 여섯인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만 14세가 되던 1940년 위안소로 끌려갔다. “딸을 내놓지 않으면 동네에서 살지 못하게 하겠다. 군복 만드는 공장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놀라 집을 떠났다. 이후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참담한 세월을 보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인 김 할머니는 1947년 귀국해 1992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신고 전화를 통해 피해 사실을 처음 고백했다. 1992년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 당시 위안부 피해 증언을 시작으로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 유럽 등에서 증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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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 원고로 참여해 실상을 문서로 증언했다. 당시 김 할머니는 “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고 있기에 그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후손을 위한 기부에도 앞장섰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대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을 제안해 1호 기부를 했고 2012년 3월 8일에는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는 ‘나비기금’을 만들었다. 2014년에는 전재산 5000만원을 기부해 재일조선고급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 25만엔씩을 지원했다. 2017년 8월엔 사후 남은 모든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김 할머니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5월 국경없는 기자회와 프랑스 AFP통신으로부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에 선정됐다. 같은 해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도 수상했다. 아울러 지난 2일 ‘공익사단법인 정’은 ‘제1회 바른 의인상’ 수상자로 선정한 김 할머니에게 상패를 수여했다. 이들은 “김복동 할머니는 한일 과거사에 대한 바른 역사관을 전파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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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김 할머니는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를 주장하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김 할머니는 “피해자들에게는 한마디 없이 협상을 타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이처럼 허무하게 협상을 진행할 줄은 몰랐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신 사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아베 총리가 직접 나서서 사죄하는 게 마땅하다”며 “한국 정부 역시 할머니들을 일일이 방문해 설득하는 짓을 그만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 8월에는 ‘1228 한일합의 강행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해 “우리 정부가 지금 올바르게 하고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느냐”며 “지금까지 대통령이 바뀌어도 우리를 괴롭히는 대통령은 없었다. 자기 아버지가 해결 못한 것을 딸이 대통령이 됐으니까 딸이 해결지으라고 부탁을 한 것이 잘못이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하고 배상을 받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제대로 끝을 못 맺을 거면 차라리 손을 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소녀상 이전 문제와 위안부 협상을 같이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김 할머니는 “앞으로 후손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비극이 있었구나’라고 알리기 위해 한 푼 한 푼 모아 소녀상을 세운 것”이라며 “‘돈 줄게 소녀상을 치우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백억이 아니라 천억을 줘도 역사를 바꿀 수 없다”고 피력했다.


이후 2017년 정부가 ‘위안부 이면 합의’를 인정하자 김 할머니는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던 일이었는데 정부는 몰라서 지금까지 미적거린 것이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제주도 국제관함식 행사에 참가하는 일본 해상자위대가 자국 함정에 욱일기를 게양하겠다고 억지를 부리자 “일본 정부는 사죄해야 한다. 아베한테 똑똑히 말을 전하라. 욱일기 들고는 못 들어온다고. 주의하라고 전해달라. 그냥 있을 것 같으냐”고 외쳤다.

지난해 9월엔 암 투병 중에도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외교부 앞에 직접 나왔다. 이날 할머니는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 여태 싸운 줄 아느냐, 1000억을 줘도 못 받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성 인권 운동가였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별세 전 스스로 눈을 뜨고 말을 하셨다. 가까이 다가가서 들으니 ‘위안부 문제 끝까지 해달라’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 지원하는 것도 끝까지 좀 해달라’고 하더라. 마지막까지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강하게 표현했다”고 전했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공식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23명이 됐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