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 리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시공간을 초월했다. 시리즈마다 극을 이끄는 주인공이 바뀌었지만 스탠 리만은 꾸준하게 출연했다. 단역, 성우, 소품의 사진을 가리지 않고 카메오로 등장했다. 마블의 세계관을 창조하고 지탱했던, 그야말로 ‘마블의 아버지’였다.
스탠 리의 첫 카메오 출연작은 1989년 5월 7일 미국 NBC에서 방영된 ‘인크레더블 헐크의 재판’. 극장판이 아닌 ‘인크레더블 헐크’ 시리즈의 방송용 영화였다. 스탠 리는 여기서 배심원 역을 맡아 잠깐 등장했다. 헐크는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엑스맨과 마찬가지로 스탠 리의 손에 의해 창조된 마블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다.
1922년생인 스탠 리의 당시 나이는 67세였다. 이미 만화 제작의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카메오 출연을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카메오의 삶 자체를 즐겼다. 영화·방송은 물론 만화·잡지에서 ‘이스터에그’(Easter egg)처럼 숨겨졌지만, 관객은 언제나 그를 찾아냈다.
스탠 리는 2000년작 ‘엑스맨’에서 핫도그 노점상으로, 2008년작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헐크의 혈액이 섞인 음료를 마셔 발작을 일으킨 노인으로, 2010년작 ‘아이언맨 2’에서 미국의 유명 언론인 래리 킹 역으로, 2011년작 ‘토르’에서 땅에 박힌 토르의 망치 묠니르를 빼내려는 트럭 운전사로 등장했다.
우주에서도 그를 찾을 수 있다. 2014년작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초반부 배경인 잔다르 행성에서다. 스탠 리는 2015년작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에서 택배기사로 등장, 상자에 적힌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이름을 ‘토니 스탱크’로 잘못 읽는 콩트로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그렇게 30년째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스탠 리는 활동 영역을 마블 안에 가두지 않았다. 미국 폭스TV의 간판 애미메이션 시리즈인 심슨에서 이미 여러 차례 등장했다. 미국 슈퍼히어로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되는 마블의 경쟁사 DC코믹스 작품에서도 카메오로 등장했다. 지난 7월 북미에서 개봉된 DC코믹스 애니메이션 ‘틴 타이탄 고’ 극장판에서 자신을 그린 캐릭터의 성우를 맡았다. 그의 대사는 “DC면 어때! 난 카메오가 좋아”였다.
스탠 리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96세.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은막에 잔상을 남겼다. 개봉되지 않은 그의 유작은 아직 남았다. 2019년 개봉될 예정인 ‘어벤져스 4’와 ‘캡틴 마블’에서 스탠 리는 카메오 출연분의 촬영을 마쳤다. 그 이후의 출연작은 알려지지 않았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