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교회 노시점 목사(왼쪽). 대나무길 따라 목회 현장을 가는데 죽순을 캐던 아주머니 한 분이 “목사님” 부르며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 간 아들이 자주 연락이 안 오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아들과 전화도 잘 안돼요. 목사님이 연락 좀 해주세요.”
아주머니의 얘기는 끝이 없다. 딱히 부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탁이 아닌 것도 아닌…우리네 고향 어머니들의 입말을 노 목사는 잘도 알아듣는다.
1895년 동학혁명 무렵 혁명의 진원지였던 고부 땅은 당시 큰 고을이었으나 면단위로 전락해 이제는 인적 찾기도 쉽지 않다. 매관매직으로 고을 수령자리 꿰찼던 조병갑의 수탈이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면단위 작은 마을은 파출소, 우체국, 작은 학교, 농협, 수퍼 등 모두가 1개다. 피아노교습소 같은 학원은 이제 찾아 볼 수 없다. 모두 서울로 떠나고, 그러기에 남은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이들 찾기도 쉽지 않다.
요즘 세상에 삼시세끼 밥이야 못먹겠는가. 하지만 ‘흩어진 가족’ ‘남은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답답한 심정을 누가 위로할까.
농사에 관한 답답함은 이장을 풀어준다 해도 응어리진 외로움이 깊어진 우울은 풀길 없는 게 농촌 현실이다.
늦 장가간 노 목사는 자녀가 없다. 고부교회가 운영주체인 지역아동센터 아동은 노 목사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다.
50대 후반 목사와 사모는 공동체의 듣는 귀이다. 너나없이 ‘설교 해대기’ 바쁜 세상에 ‘들을 귀 있는 자’이다.
우리의 고향 부모는 외롭다. 유일한 상담가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교사들마저 인근 큰 도시에서 출퇴근한다. 한때 교회가 그 역할을 대신했는데 요즘은 목사들마저 ‘호통 치는 설교’를 꿈꾸며 다 도시로 가고 없다.
사진은 2015년 5월 찍었다. 노시점 목사 내외는 지금도 여전히 작은 예배당에 남아 방과 후 쪼르르 아동센터로 달려와 매달리는 아이들을 돌본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