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완 교수의 아랍주유기>⑶ 예맨의 비극

입력 2018-07-02 16:53

기선완 교수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구약성서의 시바의 여왕이 지배하던 나라로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선물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다.

예멘은 바다와 접해있어 예부터 해상무역과 문명의 교류가 활발하였던 지역이었다. 곳에 따라 강수량도 풍부하고 식물들이 잘 자라기도 하여 풍요로운 아라비아 반도의 지역으로 불리던 예멘이다.

세계1차대전에서 아랍 전체를 지배하던 오스만투르크가 패퇴하자 영국은 이 지역에 들어와서 북예멘을 독립시키고 남예멘은 영국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중동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비극의 시작이다.

지역의 역사와 민족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강대국의 편의에 의한 분리가 두고 두고 화근이 되었다. 이후 북예멘은 왕정과 전통주의적인 색채를 유지하였으나 공화국을 주장하는 세력과 내전이 끊이질 않았다.

남예멘은 영국에서 독립하여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다가 남북 예멘은 1990년 통일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섣부른 통일은 정치세력 간의 권력 배분 문제와 부족간, 종교적, 정치이념적 차이로 통합이 아닌 갈등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2011년 아랍의 봄은 모든 것이 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전을 봉합하고 권력을 유지하던 노회한 독재자 살레 전 대통령이 퇴진할 것을 국민들이 강력히 요구했고 결국 권력을 넘겨주고 하야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공백을 대타협과 통합으로 메우지 못하고 예멘 정치인들은 한줌 자신의 권력에 집착했다. 결국 예멘은 연방 구성에 실패하고 극심하게 분열하게 되었다. 북부의 시아파 후티세력이 반군이 되었고 남부에서는 혼란을 틈타 알카에다 세력이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예멘은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반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였다. 그리고 예멘의 시아파는 이란의 시아파와는 다르고 오히려 수니파와 가까운 종파였다.

예멘이 분열하고 정부군이 견제와 압박을 하자 후티 세력은 시아파인 이란과 손을 잡고 총을 들었다. 그러자국경을 접한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신의 나라 코 앞에서 이란과 연합한 시아파 후티 반군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란은 이슬람혁명 이래 걸프 연안의 왕정국가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또한 이란은 아라비아 반도에 시아파 교두보를 확보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예멘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리전이 벌어지는 국제 전쟁의 지옥도가 펼쳐지는 전쟁터로 변했다. 시리아는 유럽으로의 난민 유입과 미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의 개입으로 국제적인 주목이라도 받지만 예멘은 국제적인 관심도 덜한 채로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전쟁의 참화를 계속 겪고 있다.

준비 안된 통일과 권력의 공백에 따른 혼란을 예멘의 정치지도자들이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권력에 집착한 결과 마침내 외세를 끌어들이게 되고 결국 국토는 외세의 대리전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되고 국민들은 지옥과도 같은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예멘은 내전의 참화로 난민이 발생하는 비극적인 곳이라는 것이다.

기선완 교수는
1981년 연세의대 입학하여 격동의 80년대를 대학에서 보내고 1987년 연세의대를 졸업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레지턴트를 마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이후 건양대학병원 신설 초기부터 10년 간 근무한 후 인천성모병원을 거쳐 가톨릭관동대학 국제성모병원 개원에 크게 기여했다. 지역사회 정신보건과 중독정신의학이 그의 전공 분야이다. 최근 특이하게 2년 간 아랍에미레이트에서 한국 의료의 해외 진출을 위해 애쓰다가 귀국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