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의 대가로 기대하는 것은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2차 방북 후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될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순항하던 북미정상회담은 ‘취소’ 사태를 겪었다. 다시 본 궤도에 올라선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선 뒤였고, 문 대통령은 그 중재의 핵심이 ‘체제보장’ 문제였음을 2차 남북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시사했다.
이런 과정은 북한 요구조건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보여줬다. 1순위는 체제보장이고 경제지원은 그 다음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을 만난 뒤 내놓은 발언은 폼페이오 장관이 했던 ‘경제번영론’과 결이 조금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에 따른 대북 경제지원을 한국 중국 일본이 하게 될 거라고 했다. 미국의 직접적인 지원에 대해선 선을 그은 것이다.
이렇게 나온 트럼프의 의중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북한이 가장 원하는 건 체제보장이지 않나. 그것을 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북한의 요구조건 1순위를 내가 들어줄 테니 2순위 경제지원은 주변국인 한·중·일이 해주는 게 맞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민간기업의 대규모 대북 투자”를 말했던 폼페이오와 달리 “한·중·일의 대북 지원”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이런 생각에서일 테다.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에 나선다고 할 때 그에 따르는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할지는 향후 북핵 협상의 주요 의제가 될 게 분명하다. 아직 북·미 간 비용 논의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비핵화 로드맵이 구체화되면 까다로운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과거 특정 국가의 핵 폐기 방식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듯 비핵화 비용 분담 역시 전례가 없는 새로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핵화 비용은 핵무기를 해체·폐기하는 데 들어가는 ‘직접비용’과 핵 관련 인력의 전직 등에 쓰이는 ‘간접비용'으로 나뉜다. 여기에 비핵화 대가로 제공할 ‘보상비용’도 포함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간) 대북 경제지원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한국이 그것을 할 것이고 중국과 일본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보상비용에 해당한다. 가장 규모가 클 보상비용을 한·중·일, 그중에도 한국이 주로 부담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북한 비핵화 비용은 연구기관이나 학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향후 10~20년간 많게는 수백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국민대 권혁철 교수는 최근 ‘북핵 폐기 비용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직접·간접·보상비용을 모두 포함한 전체 비용을 최대 270억 달러(약 28조9000억원)로 평가했다. 권 교수는 4일 “이는 탐색적 수준의 연구로 실제 비용이 얼마가 될지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외교 소식통은 “북·미 간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돼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조치를 밟아나가고 국제사회의 사찰, 검증에 적극 협조한다면 그 이후에 비용 부담 논의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북·미 직접 대화의 결과였지만 비용 대부분을 한국과 일본이 부담했다. 한국은 당시 경수로 건설비 46억 달러 중 70%를, 일본은 총액의 20% 수준인 10억 달러를 내기로 했다. 미국은 연간 50만t 수준의 대북 중유 지원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운영 자금만 부담했다. 이후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시인하면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됐고, 2005년 경수로 건설사업이 공식 종료되기까지 한국이 들인 공사비 1조3655억원은 모두 손실 처리됐다.
과거에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리비아 등의 핵 폐기 비용은 공식 확인된 바 없다. 이들 나라는 핵 개발 수준, 주변국과의 관계 등이 달랐기 때문에 비용 분담 방식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핵무기를 떠안은 우크라이나의 경우 안전보장각서(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국인 미국·러시아·영국이 핵 해체 비용과 핵 대체연료 비용을 지원했다.
리비아 역시 2003년 미국·영국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핵 포기 의사를 밝히고 관련 시설 및 장비를 미국으로 이전한 만큼 비용은 미·영이 협상해 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아공은 핵무기를 자체 폐기했고, 이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