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 한진그룹 총수 일가는 서로 다른 혐의와 의혹으로 한 달 내내 뉴스를 도배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1일 경찰에 출석한 데 이어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까지 세 모녀가 포토라인에 섰다. 그사이 검찰은 조 회장의 수백억 원대 상속세 탈루 의혹 등에 대한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교육부는 20년 전 불거졌던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의 부정편입 의혹까지 다시 들여다봤다.
◆ 신호탄 된 조현민 ‘물벼락 갑질’
시작은 조현민 전 전무의 ‘욕설 녹취 파일’이었다. 지난달 14일 조 전 전무로 추정되는 여성이 소리를 지르고 폭언을 퍼붓는 음성파일이 공개되면서 한진그룹 일가의 ‘갑질’ 논란이 불붙었다.
경찰은 사흘 뒤 조 전무를 피의자로 입건했다. 조 전무는 광고대행사 회의에서 참석자들에게 유리컵을 던지고 음료를 뿌린 혐의(폭행)와 정상적인 회의 진행을 방해한 혐의(업무방해)를 받았다. 사람을 향해 유리컵을 던졌다면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처벌받는 특수폭행이 적용될 수 있어 이 부분은 쟁점이 됐다.
지난 1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서에 출석한 조 전무는 “죄송하다”는 말만 여섯 차례 반복했다. 이후 15시간가량 조사를 마친 뒤 취재진에 “사람 쪽에 (유리컵을) 던진 적은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회의 참석자들의 진술을 종합한 끝에 조씨가 사람이 없는 곳에 유리컵을 던진 뒤 사람을 향해선 매실 음료를 뿌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어 4일 조 전 전무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기각했다.
여기에 피해자 2명이 모두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폭행 혐의는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됐다. 폭행은 반의사불벌죄여서 피해 당사자가 원치 않을 경우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 경찰은 지난 11일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해 조 전 전무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 이번엔 한진家 이명희 동영상… 계속되는 폭로
조 전 전무 사건으로 대한항공 내부 ‘갑질’ 폭로가 이어지던 시기, 이번엔 이명희 이사장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폭행 영상이 공개됐다. 여기에는 2014년 인천 그랜드 하얏트 호텔 증축공사장에서 한 여성이 현장 직원의 팔을 잡아당기거나 서류 뭉치를 바닥에 내던지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지난 6일 이 이사장을 폭행 등 혐의로 정식 입건했다. 영상 속 여성도 이 이사장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28일 피의자로 소환된 이 이사장은 조 전 전무와 똑같이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 이사장이 가사도우미나 운전기사 등에게도 상습적으로 폭행을 일삼았다는 진술이 나왔다. 31일 경찰은 이 이사장에 대해 상습폭행, 특수폭행, 특수상해, 상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운전자폭행) 위반, 업무방해, 모욕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무려 7가지 혐의가 적용됐다.
이 이사장은 2011년 8월부터 지난 3월까지 피해자 11명에게 24건의 범행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이사장은 서울 평창동 주거지에서 출입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비원에게 전지가위를 던지고, 구기동 도로에서 차량에 물건을 싣지 않았다는 이유로 운전기사의 다리를 발로 차 전치 2주 상처를 입혔다.
경찰은 “사안이 중대함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 3년 5개월 만에 포토라인… 조현아의 재등장
조 회장의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2014년 12월 ‘땅콩회항’ 사건 이후 3년 5개월 만에 다시 포토라인에 섰다. 익명 소셜미디어 ‘블라인드’에 한진그룹 총수 일가가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했다는 내부 고발성 글이 올라오면서다. 조 전 부사장은 어머니 이명희 이사장과 함께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됐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24일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그 역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반면 ‘어머니 이명희씨도 같은 혐의에 연루돼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논란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의 질문에는 함구했다.
조 전 부사장은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연수생 신분으로 가장해 고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기 위해서는 재외동포(F-4) 또는 결혼이민자(F-6) 신분이어야 하지만, 필리핀인을 일반연수생 비자(D-4)로 입국시킨 뒤 가사도우미로 고용했다는 것이다. 이 같이 고용된 필리핀인은 1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입국관리법 제18조 3항은 누구든지 이 같은 체류자격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고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경찰은 “조 전 부사장이 (가사도우미 중) 일부는 고용했다고 시인했다”고 말했다.
◆ 검찰, 한진그룹 ‘탈세’ 저격 …전방위 수사로
한진그룹 총수 일가를 상대로 한 수사는 전방위로 확대됐다. 검찰은 지난달 30일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조 회장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해 조세포탈 혐의 수사를 본격 착수했다.
조 회장은 아버지인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으로부터 해외재산을 상속받았지만 상속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납부하지 않은 상속세는 500억 원대로 추정된다. 한진그룹은 고의가 아니라 상속세 누락 사실을 몰랐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24일 조 회장의 동생인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의 주거지와 사무실 및 한진빌딩 등 10여곳을 압수수색했다. 다음날인 25일에는 미호인터내셔널, 트리온무역 사무실, 태일통상 사무실, 임동재 미호인터내셔널 공동대표의 자택 등 10여곳을 압수수색했다.
31일에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비자금과 상속세 탈루 의혹과 관련해 대한항공 본사 압수수색을 벌였다. 영장에는 횡령과 배임 및 탈세 혐의가 적시됐다.
검찰은 부동산 일감 몰아주기에서 횡령 혐의를 포착했다. 대한항공 기내 면세품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조 회장의 자녀 현아·원태·현민 3남매가 이른바 ‘통행세’를 받는 방법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배임)도 의심하고 있다. 검찰은 조 회장 일가의 횡령과 배임 규모가 최소 200억원대 이상이라고 봤다.
◆ 끝내 리스트 오른 조원태… ‘부정편입’ 다시 본다
조 회장의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도 불길처럼 번진 ‘갑질 논란’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조 사장은 20년 전 ‘부정 편입’으로 도마에 올랐다.
교육부는 다음달 4일부터 조 사장의 인하대 부정 편입학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현장조사를 실시한다고 30일 밝혔다. 교육부는 이틀간 조사관 5명을 인하대에 파견해 1998년 조 사장의 인하대 부정 편입 의혹 등을 들여다볼 예정이다.
미국 2년제 대학은 60학점에 평점 2.0을 충족시켜야 졸업이 인정된다. 그러나 조 사장은 이에 못 미치는 33학점에 평점 1.67을 이수한 뒤 1997년 하반기에 인하대에서 외국대학 소속 교환학생 자격으로 21학점을 추가로 취득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인하대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인하대 학칙에 따르면 3학년 편입 대상은 국내외 4년제 대학 2년 과정 이상 수료 및 졸업예정자나 전문대 졸업(예정)자다. 이 때문에 20년 전에도 조 사장이 ‘편법’ 편입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당시 조사를 벌인 교육부는 조 사장이 부정 편입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편입을 취소해 줄 것을 대학 측에 요구하지 않았다. 관련자 징계만 재단 측에 요구했다.
교육부는 이번 조사를 통해 1998년 당시 편입학 관련 서류들을 다시 검토하고1998년 당시 판단과 처분이 적절했는지 살펴볼 계획이다. 또 현재 인하대 편입학 운영에 대해서도 철저히 점검할 예정이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