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하늘과 땅에 크게 울릴 종소리를 기다리며

입력 2018-05-21 17:31

천지에 크게 울릴 종소리를 기다리며



진규동 박사(전남 강진군 다산기념관 다산교육전문관)


한 나라의 관료로서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다산. 그는 어느 날 남도 끝자락 강진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오갈 데 없는 신세로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애틋한 인정으로 겨우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음력 11월 도착 당시를 상상해보면 날은 춥고 차림새는 허름하여 한때 고관대작으로 궁 안에서 거닐던 선비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초라하고 그지없는 불쌍한 걸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삼시세끼 끼니라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 만해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순간에 몰아닥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어찌 한 인간으로써 지난 세월에 대한 미련과 사연들로 얼마나 찢어지는 고통 속에 지냈을까를 생각하면 감히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다산은 그때의 그 심정을 ‘상례사전서’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배생활 몸가짐은 사의재에서!
‘강진은 옛날 백제의 남쪽 변방으로 지역이 낮고 풍속이 고루하였다. 이때에 그곳 백성들은 유배된 사람 보기를 마치 큰 해독처럼 여겨서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어뜨리면서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머물게 해 주었다. 이윽고 나는 창문을 닫아걸고 밤낮 혼자 오뚝이 앉아 있노라니,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 흔연히 스스로 생각하기를‘내가 여가를 얻었도다’하고, 드디어 사상례 3편과 상복 1편을 그 주석까지 가져다가 침식을 잊기까지 하면서 정밀히 연구하고 조사하였다’ (다산-상례사전서)
실로 다산은 여기서 그의 유배생활의 다짐을 엿볼 수 있다. 비록 본인이 유배는 왔지만 이렇게 초라하게 지낼 수는 없다는 자신만의 결의를 다진 것이다. 그래서 독수공방 속에서도 읍내 아전들의 자녀들을 위해 글을 가르치며 이들에게 재미를 붙이며 자신의 학문도 연구하며 심신의 안정도 가져 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사의재’(四宜齋)라고 명명한다. 사의재란 다산이 강진에 귀양 와서 최초로 거처하던 집으로‘생각은 마땅히 담백하게, 외모는 마땅히 장엄하게, 말은 마땅히 적게,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한다’는 의미로 저술활동과 유배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서이다.

이제야 여유를 찾았구나!
이처럼 다산은 유배생활을 탄식하고 절망하면서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은 물론 피폐한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그들을 위한 치유책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 저술을 통해서 시대와 사회의 고통을 고발했다. 그야말로 다산의 삶과 학문은 위민정신과 호국정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산은 사서 육경으로 먼저 만 갈래로 찢어진 자신의 맘을 추스르고, 일표이서(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로 세상의 다스림을 도모하였다. 유배생활 동안 사서육경 탐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자기치유를 이룬 다산은 자신감을 회복하여 사회문제에 눈을 돌려서 못다 이룬 경세의 꿈에 도전한 것이다. 다산은 철학, 문학, 역사, 예학, 교육, 정치, 행정, 법, 경제, 군사, 의학, 지리, 음악 등 500여권의 저술을 통하여 나라다운 나라 백성다운 백성을 위하여 경이적인 저술 활동을 하였다.
유배생활의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다산은 새롭게 찾은 여유로운 시간으로 생각하였다. 즉, 예전에 미처 생각지도 못하던 것들에 대한 저술을 통하여 본인만의 새로운 사상과 철학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것이 바로 실학이고 다산학으로 새롭게 정리된 것들이다. 그것은 바로 500여권의 저술 속에 함축된 공정, 공평, 청렴, 개혁, 창의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복리후생을 통한 애민정신과 부국강병을 통한 호국정신의 다산정신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남겨진 위대한 정신이다.

크게 울릴 종소리를 기다리며!
경학과 경세학이라는 두 줄기의 저술을 통하여 부패한 조선을 재건하고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보살피고자 했던 다산은 죄인의 몸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경세유표, 목민심서라고 쓰면서 죽은 후에라도 임금께 보고하라는 뜻으로, 그리고 마음에 새긴 글이라고 했을까. 하지만 다산은 언젠가 자신의 글이 비록 지금은 알아주지 않겠지만 큰 종소리 울리듯 세상에 크게 울려 퍼질 것이라는 희망의 등불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겨 놓았다.
‘궁색하게 살아도 저술은 많으니, 보잘 것 없어도 천금처럼 아낀다네, 오직 한 사람이 알았으면 됐지. 세상이 다 욕해도 걱정할 것 없어, 벌레가 먹어 종을 매단 끈 떨어져도, 큰 종이야 칠 때를 기다린다오. 종소리 흘러 하늘 열리는 자리까지 닿아, 울려 퍼짐이 큰 짐승 울 듯 우렁차리라’
올해는 목민심서 저술 200주년, 그리고 다산 해배 200주년이다. 강진은 다산의 500여권의 저술 창작소였다. 200여년 전 다산이 뿌리 애민과 호국의 촛불의 씨앗은 동학의 촛불이었고, 광주의 촛불이었고, 광화문의 촛불이었다. 강진의 다산정신은 이 시대 진정한 애민과 호국의 촛불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 정신에 걸맞게 다산이 목마름으로 애타게 그리던 우렁찬 천지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나가게 해야 한다. 다산이 꿈꾼 세상이 활짝 꽃필 수 있도록, 그가 그렇게 기다리던 큰 종소리가 천지에 울려 퍼지도록 하는 일이 목민심서 200주년과 해배 20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 모두의 책무이다.‘나라다운 나라, 백성다운 백성’을 꿈꾼 다산이 바라는 세상이 천지의 종소리가 되어 크게 울려 퍼져 나가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종소리를 울릴 때이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