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북정책의 방점은 ‘압박’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두 가지 상황을 통해 이를 공식화했다. 31일 국정연설에서 북한 김정은 정권을 강도 높게 직접 비난했고, 같은 날 미국 언론은 주한대사가 내정됐던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의 지명이 사실상 무산됐다고 보도했다.
빅터 차 석좌는 백악관의 ‘코피 전략(bloody nose)'을 반대해 낙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피 전략은 ‘코피가 날 정도만 때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제한적 대북 선제타격’을 의미한다. 차 석좌는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 가운데 ‘매파’로 통한다. 북한에 강경한 인물이지만 제한적 형태라도 선제타격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차 석좌를 주한대사직에서 배제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생각보다 훨씬 강경한 대북 접근법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남한 정부와 본격적인 ‘밀당(밀고 당기기)’을 시작했다. 금강산에서 갖기로 합의했던 공동 문화행사를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마식령 스키장 공동 훈련은 그대로 추진했다. 남측 선수들은 이날 오전 전세기편으로 북한에 갔다. 앞서 현송월 모란봉악단 단장이 예술단 선발대로 방남할 때도 북한은 이를 돌연 취소했다가 다시 추진했었다.
미국의 ‘압박’과 북한의 ‘밀당’ 사이에 평창올림픽이 놓여 있다. 불과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 정부가 ‘평화올림픽’으로 만들기 위해 전향적인 조치들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미국은 대북 압박의 강도를 높였고 북한은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감췄다 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한반도 운전석’을 차지한 상태다. 하지만 앞에는 제대로 닦이지 않아 아슬아슬한 비포장도로가 놓여 있다.
◇ 트럼프 “북핵 곧 미 본토 위협… 최대의 압박”
트럼프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이란 쿠바 등과 함께 ‘적'으로 규정하고 ‘최대의 압박'을 지속할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조만간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최대한의 압박 캠페인을 벌였다"며 “북한 정권보다 더 자국민을 철저하고 잔혹하게 억압하는 정권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안주와 양보(complacency and concessions)는 공격과 도발을 유발할 뿐이란 점을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다"며 "우리를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과거 정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북 군사옵션 사용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배제하지도 않았음을 ‘주한대사 인사’를 통해 보여줬다.
워싱턴포스트는 다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차 석좌가 지난해 12월 말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에 개인적으로 이견을 나타낸 뒤 주한대사 후보에서 배제됐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 역시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같은 내용을 전했다.
차 석좌는 최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들에게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제한적 타격' 전략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는 백악관이 차 석좌를 주한대사 후보에서 빼고 다른 후보감을 찾고 있음을 정부 고위 관리가 확인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과거 정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대북 압박의 성과가 서서히 드러나는 상황에서 이를 완화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힌 것이다. 북한을 경제·외교적으로 최대한 고립시키기 위한 제제의 그물망은 앞으로 더욱 촘촘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 목줄을 죄어 비핵화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미 의회 전문 매체 ‘더힐'은 이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대북 ‘전략적 인내' 정책을 완전히 폐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략적 인내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방치해 미 본토를 위협하게 됐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 판 흔들며 ‘밀당’… 한반도 운전자 속 태우는 北
남북이 다음달 4일 열기로 합의했던 금강산 공동 문화행사는 결국 무산됐다. 북한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치적으로 내세우는 마식령스키장 남북 공동훈련만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30일 북측의 일방적인 취소에 유감을 표하고 남북 모두 합의사항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의 통지문을 이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앞으로 보내야 했다.
북한은 29일 밤 금강산 행사 취소를 통보하면서 남측 언론 보도를 문제 삼았다. 이와 함께 남북 행사 준비 과정에서 불거진 대북 제재 위반 논란 등이 복합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북한의 행사 취소 명분은 대외적인 사유일 뿐 실제로는 북한이 행사를 치를 여력이 없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많다. 북한으로 반입되는 유류를 차단한 대북 제재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새해 들어 남북관계의 급속 진전에도 북한의 변덕스러운 행태는 계속돼 왔다.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적지 않음을 예고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대화와 북핵 해결의 선순환을 이뤄내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평창올림픽이 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커진 상황이다.
당초 마식령스키장 남북 스키선수 공동훈련과 금강산 공동문화행사는 문 대통령의 ‘평화올림픽’ 구상에 따라 우리 측이 요구해 관철됐다. 평창올림픽 이후에도 남북 교류의 끈을 이어가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북한의 일방적 결정으로 이러한 의도가 틀어졌다. 대북정책과 관련한 문 대통령의 핵심 공약 사안마저도 북측의 변덕에 따라 깨질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예측이 불가능한 북측 태도에 우리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닌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측이 우리 언론 보도를 집중적으로 비난하며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것도 우리 정부에는 적잖은 부담이다. 한국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특정 부처나 당국자의 대북 발언을 조절할 수는 있어도 언론을 직접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북한의 일방적 변덕은 남북 체제 차이를 악용해 우리 정부를 길들이는 한편 ‘남남 갈등’도 유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 압박과 밀당 사이… 최대 고비는 2월 8일 ‘열병식’
평창올림픽 개막에 앞선 최대 고비는 다음달 8일 북한 건군절 70주년에 맞춰 이뤄질 열병식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해 말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처음 열리는 열병식이어서 북한은 자축 차원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 14형’과 ‘화성 15형’ 등 전략무기를 대거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열병식은 대외적 메시지 발신 외에 내부 결속 목적도 있어 북한이 행사를 ‘톤다운’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을 겨냥한 호전적인 발언이 나올 수도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 열병식에 대해선 “예단하지 않겠다”며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열병식 내용에 따라서는 우리 정부가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열병식에서 노골적인 대미 위협 메시지가 나올 경우 우리도 한·미동맹 차원에서 상응하는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남북 관계를 고려해 지나치게 절제된 메시지를 낼 경우 ‘한·미동맹 이완론’이 불거질 수 있다. 반대로 대북 반응이 너무 강경하면 남북 관계 관리가 어려워진다. 북측이 열병식 이후 또다시 우리 언론 보도 행태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북측은 금강산 행사 취소를 통보하면서 “(한국 언론이) 내부의 경축행사까지 시비했다”고 비난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