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영 “선수촌서 혼자 몰래 나왔다”… 결단식 중 짐 싼 ‘국가대표’

입력 2018-01-24 15:28 수정 2018-01-24 15:32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노선영(29)은 24일 아침 강릉 오벌(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을 떠나 홀로 서울로 돌아왔다. 노선영은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혼자 몰래 나왔다”고 말했다. 전날 테스트 경기를 치른 동료들이 보완점과 전략을 전달받을 때, 노선영은 퇴촌을 명령받았다. 동료들이 평창올림픽 선수단 결단식에 참석한 동안 그는 태릉선수촌에서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겼다. 노선영은 그렇게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여자 팀추월에서 메달 기대를 모으던 그는 지난 20일 돌연 올림픽 출전 불가 통보를 받았다. 출전 자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연맹의 실수였다. 할 일이 사라진 노선영은 지난 23일 강릉 오벌에서 동료들의 훈련을 멍하니 지켜봤다. 스케이트를 타지 않고 앉아 있는 그에게 전명규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이 다가와 “못 나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노선영은 “국제빙상연맹(ISU)에 따지지도 않고 가만히 있느냐”고 항변도 해 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따져서 될 문제가 아니다. 감정에 호소해서 될 게 아니다”는 말뿐이었다. 노선영은 숙소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백철기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밤 10시를 넘어 전화가 걸려 왔다. “퇴촌하라”는 것이었다. 울먹이는 노선영에게 백 감독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노선영은 “20일도 안 남았을 때 이렇게 통보하는 것은, 스케이트 선수를 그만 두라는 뜻밖에 안 된다”며 허망해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팀추월 훈련에 매진하던 그였다. 연맹과 대표팀 지도자들은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이 팀추월과 매스스타트에 주력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팀추월 자동 출전권을 얻었다는 말만 믿고 노선영은 1500m를 놔둔 채 팀추월 훈련만 했다.



밥 먹고 쉬고 운동하고, 밥 먹고 쉬고 운동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평창만을 바라본 인내였다. 노선영은 “ISU의 말대로 1500m 성적이 팀추월 출전에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1500m 훈련을 시키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1500m 세계 32위에 못 들 실력이 아니었다. 노선영이 “어떡하느냐”고 물을 때 대답해준 사람은 아직 없다.

노선영은 “단지 평창이기 때문에 4년을 더 한 것”이라고 했다. “다시는 없을 자국에서의 올림픽이잖아요. 그리고 저는 의미가 조금 다르잖아요.”

2006년 토리노, 2010년 밴쿠버, 2014년 소치에서 이미 달린 베테랑 노선영에게 올림픽 무대 자체가 꿈인 건 아니었다. 다만 동생 진규와 마음으로 함께 하자던 평창 무대였다. 누나를 따라 스케이트를 탔던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고(故) 노진규는 소치올림픽 직전 골육종 진단을 받았고 2016년 세상을 떠났다.

꿈을 잃은 노선영은 다시 국제대회에 나설 힘이 없다. 소속팀과의 계약이 1년 남은 상태지만 국제대회에 나설 길은 없다. 어차피 연맹이 올 여름 선발할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팀을 남녀 모두 만 26세 이하 선수들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만 27세 이하까지로 제한되고, 이후에 이 규정은 사라진다. 노선영은 “나이 든 사람은 그만 하라는 뜻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노선영이 얼음판 위에서 수없이 되뇌인 말은 “후회 없이 달리자”는 것이었다. 그는 “메달을 따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납득할 만큼 달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상을 조심하고 먹을 것을 가려가며 정성으로 준비해온 올림픽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노선영은 쉽게 믿지 못했다. 그는 한숨 끝에 “나는 피해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노선영을 잃은 대표팀도 비상이다. 500m나 1000m 선수 가운데 한 명을 뽑아 여자 팀추월 주자로 채워 넣을 생각이다. 하지만 출전 이상의 의미는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노선영은 “한 바퀴나 두 바퀴를 타는 선수가 장거리인 팀추월에 나선다는 건 형식적인 대처일 뿐”이라고 말했다.

노선영은 2011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동계아시안게임 여자 팀추월과 매스스타트에서 금메달을, 여자 15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노선영이 대표 선발전 1500m를 1위로 통과했을 때 “평창에 가게 됐다”며 좋아하던 그의 부모님은 지금 상심이 크다. 노선영은 “솔직히 올림픽을 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