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패터슨은 매일 시를 쓴다. 하찮은 것이라도 그는 유심히 관찰한다. 성냥갑에서 영감을 얻어 열렬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쓴다. 운전대에 앉아 아내가 싸준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한결같이 시를 쓴다. 운전하며 승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소리는 다양하다. 때론 치졸하고, 때론 의기 넘치는 대화가 오간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비슷한 소시민들이다. 직장 동료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스트레스를 털어놓고, 매일 들르는 바의 주인은 아내의 비상금을 슬쩍했다가 잔소리를 듣는다. 그의 삶은 평온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이는 그가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대하는 사람들에게 차별을 두지 않는다. 연령, 인종에 상관없이 그들의 다름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일상의 시인, 패터슨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감독 짐 자무시가 열린 눈으로 바라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빔 벤더스, 로베르 브레송, 오즈 야스지로 등 예술영화의 전통을 계승한 자무시 감독은 ‘천국보다 낯선’(1984)부터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까지 오랜 기간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미학을 구축해온 대표적인 미국 인디영화 감독이다.
작고 단순한 것, 일상의 휴지부, 낯선 것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자무시 감독의 세계관은 소시민적 인물, 패터슨이 보내는 일주일의 일상으로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패터슨’에서 배우는 것은 그가 사람과 사물을 보는 방식이다.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모두 다르다. 아내 로라가 그린 동그라미들처럼 다양한 모양과 빛깔을 내는 사람들이다. 아내가 커튼에 칠한 동그라미를 보고 그는 말한다. “동그라미가 모두 달라서 좋다.” 그는 사물이 품고 있는 다양한 톤과 결을 발견해서 언어로 옮기고 상상력을 입혀 시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패터슨의 일상은 때로 값진 만남을 선사한다. 셀프 세탁방에서 세탁기를 돌리며 랩을 연습하는 스웨그(swag) 넘치는 흑인 청년의 흥겨운 감각을 즐거워하고, 열 살배기 금발머리 소녀가 읊어준 시를 잊지 못한다. 애완견이 비밀 수첩을 갈기갈기 찢어놓자 우울함을 달래려 패터슨시의 유명한 관광지, 그레이트 폴스(Great falls)로 산책을 간다. 거기서 자신이 사랑하는 패터슨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좋아하는 일본인을 만난다. 그는 “때론 빈 페이지가 더 큰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며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건넨다. 그는 가능성을 선물로 받는다.
크리스천이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신의 시선을 흉내 낼 수도 없다. 그리고 편리함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곤궁하고 비루한 일상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다. 거기서 아름다움과 소망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객관적으로 분별하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일은 지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할 수 있지만, 거기서 최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은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보는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다. 가능성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 일상의 진부한 클리셰(cliché)를 다양한 빛깔로 채워가는 그는 시를 쓰는 버스 운전기사다. 그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꾼다.
임세은(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