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당했다' vs '절대 안했다' 증거없는 성범죄 재판…골머리 앓는 법관들

입력 2016-09-16 10:25 수정 2016-09-16 11:03

“피고인, 가방 손잡이 사이에 손을 넣어보세요”지난달 30일 서울법원종합청사의 한 형사 법정. 재판부가 피고인석에 앉은 50대 남성을 법대로 불러낸 뒤 검은색 서류가방을 불쑥 내밀었다. “본인이 쓰던 가방 맞죠?”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판부는 '왼손을 서류가방 손잡이 사이에 넣어보라'고 말했다. 손목을 넣었다 뺀 남성은 “당시 3월이라 외투를 입고 있어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재판부는 “선고 전까지 피고인 손목 둘레를 측정한 자료를 제출해 달라”고 변호인 측에 요청했다.

이 남성은 지난해 3월 서울 지하철9호선 고속터미널 역을 운행하는 지하철 안에서 20대 여성의 신체를 손으로 만진 혐의(공중밀집장소 추행)로 그해 11월 불구속 기소됐다. 5번에 걸친 재판 내내 남성은 무죄를 주장했다.

“저는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죽고 싶습니다. 밤에 잠도 못자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제가 가방을 손목에 걸고 자신을 만졌다고 하는데, 제 손은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이날 검증은 이 남성의 주장을 확인하려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지하철·버스 등 대중교통에서 벌어지는 성추행 사건을 심리하는 판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피고인 상당수가 ‘절대 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하는데, 사실관계를 판단할 증거는 피해자 진술 밖에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지하철 성범죄 적발 건수는 2012년 314건, 2013년 1307건, 2014년 1356건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그 중 약 90%는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성폭력 특례법은 공중밀집장소 추행의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대부분 밀집한 상황에서 벌어져 범죄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이우희 판사는 지하철 안에서 여고생의 엉덩이를 만진 혐의로 기소된 회사원 A씨에게 지난해 7월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사는 “공소사실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 진술뿐”이라며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지하철과 같은 공중밀집장소에서는 무의식·실수에 의한 접촉이 발생할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고의로 성추행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형사법관은 “순전히 피고인과 피해자의 진술 중 어느 쪽을 더 신뢰할 수 있느냐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피해 여성이 법정에서 ‘바로 내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나한테 많이 불쾌하셨죠, 괜찮으세요 라는 말도 했다’며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데, 제출된 기록에는 그 여성의 진술은커녕 신원도 제대로 기재되지 않은 경우에는 정말 난감해요.”

일선 경찰관들이 고속터미널·사당역 등 혼잡한 지하철역에 잠복하며 성추행 현장을 소형 카메라로 촬영해 증거로 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료가 매번 유죄의 증거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는 지하철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회사원 B씨에게 “단속 경찰관 진술과 현장 촬영 동영상을 봤지만, 당시 혼잡한 전동차에서 피고인이 고의로 성추행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1심에 이어 무죄를 선고했다.

공중장소밀집 추행죄는 강제추행죄에 비해 법정형이 낮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 벌어진 사건의 경우 회사·가족 등에 단속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단속 과정에서 거센 승강이가 벌어지곤 한다. 가해자들이 “절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성추행 범죄에 대한 대책으로 부산지하철 등에서 ‘여성전용칸’이 생겼지만 인터넷 등에선 ‘남성 역차별’ 등 또다른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다만 ‘절대 아니다’라던 남성들도 증거가 있을 경우 바로 꼬리를 내린다고 한다. 최근 버스에서 자고 있는 여성의 허벅지를 만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C씨는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모든 걸 인정 한다”고 순순히 자백했다. 버스 내부에 설치된 CCTV가 결정적 증거였다. 한산한 버스 안에서 C씨가 여성 옆 자리로 이동해 신체를 만지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다.

한 성폭력 사건 전담 법관은 “치한 범죄는 몰카 범죄와 비슷하다. 재범으로 또다시 법정에 오는 경우가 많다”며 “증거 불충분으로 한번은 처벌을 피했다고 해도 재차 사건에 연루될 경우 유죄를 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올 초 법원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여성을 성추행한 변호사 D씨(47)에게 “동종 범행으로 기소유예 전력이 있음에도 재차 범행을 저질렀다”며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