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마술사 이은결은 왜 일루셔니스트 EG가 되었나

입력 2016-03-28 15:53 수정 2016-03-28 17:15

실험적인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의 개막작은 프랑스의 마술사 겸 영화감독이었던 조르주 멜리에스(1861~1938)를 소재로 한 비언어 퍼포먼스 ‘멜리에스 일루션-에피소드’(3월 25일~4월 2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이다. 멜리에스가 20세기 초엽의 초기 영화에서 실험했던 것들을 무대에 펼쳐 보이는 이 1인극의 주인공은 한국 마술계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은결(35)이다.

그리고 이 공연의 구성과 연출을 맡은 인물은 ‘일루셔니스트 EG’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바로 이은결 자신이다. 마술사로서 대중적인 마술쇼를 할 때와 분리해 작가주의 예술가로서 아무 선입견 없이 관객과 만나고 싶어서 만든 이름이다. 그가 앞서 EG로서 만든 ‘디렉션’은 지난 1월 현대 공연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 시립극장(테아트르 드라빌)의 초청을 받아 공연되기도 했다.

지난 27일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을 마친 뒤 만난 그는 “어린 나이에 마술을 시작해 누구보다 빨리 꿈을 이뤘다. 하지만 2006년 FISM(세계마술사연맹) 월드챔피언십 1위를 차지하고 2007년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한 뒤 매너리즘에 빠졌다”면서 “당시 답답함을 느끼며 미학 등을 혼자 공부하다가 2009년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작가의 제안으로 ‘시네매지션’을 함께 만들면서 무대 위 행위자인 마술사가 아니라 퍼포먼스를 직접 만드는 창작자로서 길을 찾게 됐다”고 밝혔다.

마술과 영화를 결합했던 멜리에스를 소재로 한 ‘시네매지션’은 마술, 영화, 영화를 찍는 행위에 대한 총체적 퍼포먼스다. 멜리에스는 최초의 SF영화 ‘달나라 여행’을 찍은 인물로 ‘이중노출’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 등 영화기법을 처음 도입하고 영화흥행 시스템을 확립한 인물이다. 정연두와의 작업 이후 멜리에스에 대해 더욱 깊이 천착한 그는 지난해 페스티벌 봄에서 처음으로 ‘멜리에스 일루션-프롤로그’를 선보였고, 올해 발전된 버전인 ‘멜리에스 일루션-에피소드’를 선보였다.

그는 “멜리에스는 원래 마술사 출신으로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즉 움직이는 이미지에 매료돼 영화를 만든 인물이다. 그가 영화에 다양한 기법을 도입한 것은 마술에서 사람들을 놀래키는 트릭과 연관이 돼 있다”면서 “마술은 역사 속에서 크게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는데, 하나는 영화의 발명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의 발명에 따른 것이다. 첫 번째 죽음 이후 멜리에스를 시작으로 주술적 성격을 버린 마술은 기술을 다양하게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그 정점에 선 인물이 바로 데이비드 카퍼필드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이 최근 진행되고 있는데,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요즘 시대에 마술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마술이 ‘신비주의’를 버리고 무대 위 일루션(환영)을 다루는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마술 테크닉이 모조리 공개되고 마술 특유의 신비감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마술의 예술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지난 3월 미국에서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의회에 마술을 예술로 인정해달라는 법률을 제정해 달라고 요구한 것 역시 그와 비슷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마술이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학문으로 정립되지도 않고 미학도 없는 것이 안타깝다. 마술사들이 이제 마술은 픽션(허구)이라는 것을 관객 앞에서 인정한 뒤 일루션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화가 제9의 예술로 받아들여진 것처럼 일루션이 제10의 예술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충분하다”면서 “물론 아직도 많은 마술사들이 관객들과 대치한 채 비밀을 숨기고 신비감을 유지하고 싶어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나 역시 EG로서 일루션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제 막 실험하기 시작한 단계다. 내년 한국에서 열리는 FISM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할 생각인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의 ‘멜리에스 일루션’ 시리즈는 영화에 조예가 깊은 관객이 아니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마술쇼가 대극장에서 장기공연되며 수많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는 “일루션에 대한 실험이 우선이라 관객에 대한 친절함은 신경쓰지 않았다. 마술쇼는 수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상업공연인만큼 친절해야 하지만 작가주의 공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나를 이해하고 따라와주길 기대한다”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마술사 이은결로서 무대에 서는 것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오는 4월 4~14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마술사 데뷔 20주년 공연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을 여는 등 앞으로도 마술쇼를 계속 열 생각이다. 사실 마술쇼를 통한 경제적 수익은 그가 예술작업을 하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멜리에스 일루션’ 시리즈의 경우 각종 방송장비와 영화장비 등이 필요한 만큼 막대한 비용이 든다. 그는 “마술의 위기인 지금은 이은결과 EG를 분리해서 공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도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